노회찬 의원의 정치 일대기

평생을 노동운동가로서 반독재와 노동운동에 앞장서고 진보정치를 대표하던 노회찬 의원이 23일 62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80년대 서울·인천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현장에 뛰어든 이후 평생을 노동·진보 정치운동에 몸담은 그는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대한민국의 노동·진보정치를 ‘대중정치시대’로 이끈 주역이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과 갑작스러운 비보에 노동·정계에서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노회찬 의원은 1956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중학교를 거쳐 1973년 경기고등학교(72회)에 입학했다. 고등학생인 그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과 유신 반대 운동을 계속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충격을 받아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재학 시절 중 용접을 배워 용접공으로 취직했고 현장 노동자들과 섞여 지내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 이후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이듬해 인민노련 결성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돼 2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 노 의원은 법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고 만기 출소하던 1992년, 백기완 대통령 선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에 노 의원은 제도권을 노동운동에서 정치로 바꾸며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대표로 활동했다. 1995년 개혁적국민정당 창당준비에 가담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창당 당시 ‘꼬마민주당’과 통합한 ‘통합민주당’에 참여했다. 그는 과거 인민노련 사건으로 수감한 경력이 사면되지 않아 총선에 나가지 못했다. 이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으로도 일하며 1997년엔 대중 역사서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을 쓰기도 했다. 

2000년 권영길 전 의원의 대선을 지원하며 본격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노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뱃지를 단다. 당시 무명의 인사였던 그는 각종 TV토론에 나와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으며 유명 정치인으로 발돋움 했다. 

한 TV 토론에서는 “50년 동안 같은 판에 삼겹살을 구우면 고기가 탄다. 판을 갈 때가 왔다”라며 촌철살인의 말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인기에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8번까지 당선이 됐다.

2010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노 의원은 2012년 총선에 당선(서울 노원병)됐지만 이듬해 삼성X파일 사건에서 ‘떡값검사’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등을 거쳤다. 이후 20대 총선에서 경남 창원성산을 지역구로 출마해 다시 당선되며 진보진영의 대표로 우뚝 섰다.

20대 국회 정의당 1~3기 원내대표를 지내며 소수 진보정당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 했으며, 올해 4월에는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를 위한 의원모임을 출범하고, 첫 등록 대표를 맡아 원내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 앞장섰다.

우리 시대 진보정치의 상징일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서민적인 대중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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