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가계와 삶터

박재혁 의사의 가족 왼쪽부터 의열단원 박재혁의 모친 이치수 여사, 박재혁 의사(가운데), 여동생 박명진.<자료 사진= 유가족 이손녀 제공>
▲ 박재혁 의사의 가족 왼쪽부터 의열단원 박재혁의 모친 이치수 여사, 박재혁 의사(가운데), 여동생 박명진.<자료 사진= 유가족 이손녀 제공>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가계와 삶터

박재혁은 밀양박씨 박희선(朴喜善, ?~1909)과 경주이씨 이치수(李致守, 1873.8.7~1949.10.8)의 외아들로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 183번지에서 태어났다. 박희선 집안과 관련한 사실은 밀양박씨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집은 양반 가문이라기보다 평민일 가능성이 크다.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가계도 박재혁은 부친의 가계는 알 수 없지만, 모친의 가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자료 제공=이병길>
▲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가계도 박재혁은 부친의 가계는 알 수 없지만, 모친의 가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자료 제공=이병길>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民籍法)을 1909년에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평민과 노비는 양반과 같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제도화가 되었다. 성이 없던 사람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면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였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 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때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박희선은 1909년 사망하였기에 현재 제적등본 등을 통해 부모 형제를 파악하기 힘들고 그와 관련한 인척들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본다면 양반보다는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당시 박재혁의 부모와 외가가 살았던 부산시 동구 범일동과 동래구 복천동이 전통적인 양반의 거주지가 아니었던 것도 한 이유이다.

최근까지도 그의 이름은 박희선이 아닌 박광선(朴光善)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부인 이치수가 생존할 당시 박재혁 의거를 최초로 추모한 신문 <민주중보(1946.03.01.)> 보도에서부터 비롯된 듯하다. 그런데 훗날 박재혁이 중국으로 갈 때 돈을 빌려준 인물이 경북 왜관의 박국선이다. 이름 끝 자 돌림이 '선'이라 친척의 항렬일 가능성도 있다. 훗날 박재혁의 사후양자가 박기동이기에 밀양 박씨와의 연관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어떤 정보도 없다. 그는 형제 없는 독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런 친인척이 그의 사후 박씨 집안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희선은 세세청빈한사(世世淸貧寒士)였다. 즉 대대로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집안사람이었다. 그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박희선과 달리 모친인 이치수의 가계 정보는 제적등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치수는 부친인 경주이씨 이호근(李浩根,?~1894.5.2)과 모친인 경주김씨 김유금(金有今, 1844.4.29~1929.11.23)의 장녀로 1873년 8월 7일 태어났다. 김유금의 부모는 김익련(金翼連)과 박소옥(朴小玉)이다. 이치수는 동래면 복천동 188번지에 살았었다. 이치수의 부친 이호근은 박재혁이 태어나기 1년 전인 1894년 5월 2일 사망하였는데 당시 주소가 동래면 복천동 188번지였기 때문이다.

 

의사 박재혁 가족의 삶터

박희선과 이치수는 1892년 결혼하여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에서 살았다. 1895년 5월 17일 장남이자 외동아들인 박재혁을, 1909년 1월 11일 여동생 박명진을 낳았다. 출생한 범일동 집은 47평이었다. 현재 범일동・좌천동 가구거리의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이 생가터임이 알려지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부산동구 범일동 183번지)는 현재 가구거리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올해 초 그의 생가터 안내판을 동구청이 세웠다.<자료 제공=이병길>
▲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부산동구 범일동 183번지)는 현재 가구거리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올해 초 그의 생가터 안내판을 동구청이 세웠다.<자료 제공=이병길>


토지대장을 보면 박재혁의 출생지인 부산시 동구 범일동 183번지는 명치 45년(1912) 5월 10일 박재혁 소유였다가 대정 2년(1913) 4월 1일 모친 이치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된다. 그리고 대정 8년(1919) 5월 5일 백우민에게 집이 매도된다.

박재혁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박재혁 가족은 1919년 6월 27일 범일동 550번지로 이사를 한다. 1919년 3.1운동 이전부터 박재혁은 국내에 없었기에 모친 이치수와 여동생 박명진이 거주한 집이다. 현재 이 번지를 기준으로 2012년 동구청이 근처 조방로에 '박재혁 거리'를 만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박재혁 사후, 가족들이 살았던 집들은 외가였을 가능성이 있거나 외가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재혁의 생가는 범일동 183번지로 그가 실제로 살았던 집이다. 1909년 12월 10일 아버지 박희선의 사망으로 박재혁은 이 집을 호주상속을 한다. 그 후 박재혁이 중국과 싱가포르에서 생활할 때인 1919년 6월 27일 범일동 550번지로 이사를 한다. 이사 이유는 박국선의 독촉 때문에 범일동 183번지 집을 팔았기 때문이다. 이때 외조모인 김유금도 같이 생활한다.

그런데 1920년 10월 5일 <매일신보>에는 범일동 335번지로, 1921년 대구복심과 경성고법 판결문에는 부산부 범일동 354번지로 나와 있다. 1921년 5월 11일 박재혁 사후 모친 이치수는 범일동 550번지와 복천동 188번지를 호주상속을 한다. 박재혁의 여동생 박명진이 1923년 9월 1일 부산진일신여학교에 입학할 당시 학적부 주소는 범일동 345번지였다. 1925년 박재혁 친구 김영주의 여동생 김남정(1905년생)이 복천동 188번지에 사는 조근호와 결혼을 한다. 우연치고는 인연이 깊다.

1925년 6월 10일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를 동래구 복천동 500번지에 신축 교사(기숙사 설치)에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 칭한다. 당시 박명진의 학적부에 따르면 복천동 492번지에 살았다. 박명진의 제적부 본적 주소는 복천동 188번지이다. 두 주소는 지근거리며 바로 학교 앞이었다. 1927년 3월 22일 박명진은 동래일신여학교를 2회로 졸업한다. 학적부에 보증인(호주)이 숙부로 박재혁의 친구 최천택이 되어있는데, 그의 직업은 상업 종사였다.

박재혁 사후 가족들의 범일동과 복천동의 주소가 다소 복잡하다. 이사를 자주 하고, 거주지가 달라졌다는 것이 현실이었다면, 그만큼 삶이 궁핍했다는 증거이다. 이치수는 1927년 9월 6일에 동래면 복천동 188번지로 주소를 옮긴다. 그 집은 모친 김유금이 살고 있었던 집이다. 박명진은 1929년 1월 22일 양산군 상북면 상삼마을의 만석꾼 김정훈(1895.3.3.~1946.1.27.)과 결혼을 한다.
 

박재혁 가족의 삶터 지도 -박재혁 의사의 가족은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도 자주 이사를 한 듯하다. 그만큼 궁핍했던 것 같다. <자료 제공=이병길>
▲ 박재혁 가족의 삶터 지도 -박재혁 의사의 가족은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도 자주 이사를 한 듯하다. 그만큼 궁핍했던 것 같다. <자료 제공=이병길>

 

김정훈의 첫째 부인은 울산의 선각자로 주일은행 설립과 경남신문 창간, 상해 임정 임시의정원을 한 김홍조의 장녀 김순원(1892.11.14.~1926.1.11.)이다. 김순원이 사망한 지 3년 후였다. 1929년 11월 23일 외조모 김유금이 복천동 188번지에서 사망한다. 이치수는 장녀로서 모친인 김유금을 모셨던 것 같다. 그 후 홀로 남게 된 이치수는 아들의 친구 최천택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한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이 글의 박재혁 관련 각종 자료 및 사진은 박재혁 의사 유가족 이손녀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더불어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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