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17일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된 이지함의 묘, 보령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 1992년 8월 17일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된 이지함의 묘, 보령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폴리뉴스=홍정열 기자] MBC 주말 사극 드라마 ‘옥중화’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조선전기 문신 학자 토정 이지함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드라마 초반 토정은 삿갓 대신 솥단지를 머리에 쓰고 기인 행세를 하지만, 천재소녀 다모 옥녀의 스승으로 극이 전개되면서 500년 전 그의 일상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지함 하면 그의 아호가 연상되어지는 토정비결이 먼저 떠오른다. 역술가, 점술가는 물론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이처럼 토정은 천문, 지리, 주역에도 능통했다는 설과 함께 실제로는 전통 유학을 기본으로 한 사회경제 개혁사상가, 사회복지 실천가라는 주장이 제기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남 목포MBC 장용기 편성제작국 부국장은 자신의 글에서 토정은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본업인 농사 의존에서 벗어나 말업인 수산업 장려를 주장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장 부국장이 전하는 토정은 조선의 해금정책 해제를 주장하며 ‘본말상보론’을 작성해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 백성의 빈곤구제에 역점을 두었던 인물임은 확실해 보인다.

<폴리뉴스>는 토정 탄생 500주년을 맞아 당시 토정 선생의 섬과 바다에 대한 인식, 또 우리 사회에 어떤 해결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를 연구한 장용기 부국장의 글을 소개한다.

토정 이지함의 섬과 바다에 대한 공간인식-장용기(목포MBC 편성제작국 부국장)

 토정 이지함(1517~1578)선생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토정비결의 저자이고 패랭이와 삼베옷, 짚신을 신고 다니는 양반답지 않은 양반의 기인행각을 연상한다. 뭔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 신비스런 인물로 각인되고 있는 게 토정 이지함 선생에 대한 지금까지의 현실 인식이다. 토정이 조선전기 유교 성리학적 관점의 정치사회 지배 이념에 직접 간접적으로 도전하고 백성의 가난구제에 초점을 두고 시대를 뛰어넘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현실개혁론자였다라고 하면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분들이 많다. 토정 이지함의 섬과 바다에 대한 공간인식을 주제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왕조 말기까지 해금정책과 함께 섬과 바다를 천시해왔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나라였다. 심지어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 해금정책을 해제하고 일부 개방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조선은 명나라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대의 대의명분아래 해금정책을 줄곧 유지해 왔다. 조선 지배층의 해금정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돼야할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대라는 명분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피지배층인 백성을 농업과 농토에 묶어둠으로써 사회 신분의 고정성과 폐쇄성 등을 통해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장점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유교 성리학 사상이 당시 말업이라고 천시했던 상업과 광업, 수산업 등은 유통과 섬, 포구, 바다 등을 통해 물자와 정보, 사상이 교류되고 비교되는 개방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봉건 왕조들은 개국 초기에 상대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속박하고 금지하였던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충남 보령에서 고려말 정도전, 정몽주등의 제자를 길러낸 대유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으로 태어난 양반 출신이다. 토정은 조선전기 중종 12년에 태어나 인조 명종대를 거쳐 선조11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정의 생애 전후인 16세기 시대적 사회적 상황은 각종 사화와 당쟁이 심했으며  조선 개국초와 달리 당시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고 토지세금과 군역, 요역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강제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던 시기였다.

 이지함은 자신이 살았던 시기를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사태로 진단하고 지배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본업인 농업으로는 백성들의 가난구제가 불가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농업을 본업으로 하되 수산업과 광업 등 이른바 말업으로 어려움에 빠진 본업인 농업을 보충하자는 절충안을 상소문을 통해 제시했다. 바다와 섬에 눈을 돌려 바다 섬의 강점을 살려 백성의 가난 구제를 하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담은 토정의 획기적인 주장은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심지어 개혁론자로 일컬어지는 대유학자 이이에서 정약용에 이르도록 개혁성향을 지닌 성리학자들의 건의나 상소 등에서 찾아볼 수 없다. 토정 사후 200년이 지난 북학파에서 일부 학자들이 제기했을 뿐이다.

 토정은 실용주의와 실천을 앞세운 경세사상가이자 사회복지 실천가이기도 했다. 특히 재야의 기인 토정과 제도권 관료 모범생 율곡과의 독특한 친분 관계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율곡 이이(1536~1584)보다 20여년 앞서 태어났고 비록 추구하는 학문의 길과 삶의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생각과 교류관계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토정 이지함이 생애 마지막 해인 1578년 아산 현감 때 질병으로 숨지자 율곡 이이가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으며 6년 뒤에 이조판서였던 율곡이 죽자 선조가 통곡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이는 토정선생 술회기에서 "내가 일찍부터 속마음 내비치고 조금의 장벽도 없었다. (토정)선생은 나에게 인망(人望)을 요구했고 나는 선생에게 천방(天放)을 조금 거둘 것을 요청했다. 서로를 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늦은 공업(功業)을 얻기를 빌었다." (이이의 석담일기)

 이같은 이이의 기록을 통해 기인으로 불렸던 토정 이지함의 정신세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토정 이지함은 50대 중반을 넘어 유일로 관료로 천거돼 두 차례 지낸 현감 시절 백성들의 가난과 고통 실상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 중에 이번 주제발표와 관련돼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 직업제 사회에서 농사로는(농본)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어려우니 말업(어염업, 광업)으로 보강하자는 내용이다.

 이른바 바다와 섬의 강점을 활용해 백성의 어려움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는 해금정책을 유지하면서 바다와 섬을 천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으나 토정은 구체적으로 전라도 만경현 앞의 양초도를 어업수산기지로, 황해도 풍천현 앞의 섬인 초도정을 소금생산기지로 만들어 그 곳에서 생산된 물고기와 소금을 곡식으로 바꿔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 재정에 보태자고 제안했다. 이밖에도 토정 이지함은 야인시절 한 섬에 주민들과 박을 심어 그 박 수 만개를 팔아 곡식으로 바꿔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등 자원으로서의 바다와 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번 주제발표에서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토정 이지함이 조선의 금기였던 바다와 섬을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했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한정하고 그리고 토정의 이러한 바다와 섬에 대한 공간인식이 현대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 바다와 육지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자

1)이지함의 생애

 토정 이지함이 왜 조선시대 지배층이 금기시했던 바다와 섬을 중시하게 됐는지와 바다의 섬을 백성의 가난을 구제할 창고로 여기게 됐는지 먼저 생애사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토정은 태어난 곳이 충남 보령으로 바닷가와 접한 곳이고 상업 포구의 중심지인 한강 마포에 토정을 지은 것을 보면 어렸을 적부터 바다와 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듣고 자랐을 것이다. 또 토정은 비록 양반 가문으로 태어났지만 삶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종조할아버지 이파가 연산군 시절 폐비윤씨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는 이유로 아버지 이치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진도로 유배되고 중종반정 이후 벼슬길에 나갔으나 지함이 14살 때 5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광산김씨도 2년 뒤 숨을 거뒀다. 형 지번 밑에서 공부를 했으며 지번도 몇 년 뒤 벼슬도 나가기 전에 유배생활을 했다.

 지함은 10대 때 부모를 여의고 형 아래서 공부하며 겪은 평지풍파를 보면서 세상을 보는 눈과 입장을 세웠으리라 생각된다. 보통 세상을 보는 입장과 관점은 10대 청소년 시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지함이 스무살 전후에 결혼한 처가 장인은 모산 수 이정랑으로 태종 이방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줬던 2대 정종의 증손이다. 10여년 뒤인 1549년 토정 32세 때 장인이 충청도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몰려 처형당하면서 지함도 연좌제에 걸려 벼슬살 진출이 좌절되고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기인의 행각을 벌인 게 아닐까 추정된다. 앞서 1년 전 1548년 을사사화를 비판하는 시정기 작성사실이 밀고 되면서 처형된 예문관 검열관인 친구 안명세의 죽음도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일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충청도 대표 의병장이자 토정 이지함의 제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토정사후에 벼슬을 내려달라는 상소문에 따르면 이렇다.

 "그가(토정 이지함)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스스로의 몸을 숨긴 것은 화를 피하였다가 조정이 밝아질 때 시용되고자 함이오, 전적으로 세상에서 은둔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중봉의 상소에 나옴) - 출처 토정 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p.345)

토정비결 판본들.
▲ 토정비결 판본들.

2) 왜 섬과 바다인가

 지함의 셋째아들 산룡이 섬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함은 장인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앞서 고향 보령에 내려온 가족을 데리고 섬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인 충남 보령 앞바다에는 안면도를 비롯해 삽시도, 원산도, 장고도, 덕적도 등이 있고 서천에서 가까운 부안과 김제 앞바다에도 선유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부터 지함은 섬과 바다에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나중 수선(바다의 신선)이라는 호도 쓰며 배를 이용해 전국 곳곳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함이 정확히 몇 년 동안 잠행 생활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조카 이산해가 쓴 '이지함 묘갈명'에서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한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함은 섬사람의 거친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전국의 어부들로부터 바다와 섬에 관한 지식과 항해술과 조류의 흐름 등 지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생활과 어업등 수산업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이다.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바가지를 달아가지고 세 번 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우환은 없었다고 한다. 손수 장사를 하며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빈손으로 생업을 경영해 수년 안에 곡식 수 만석을 쌓았다가 빈민들에게 나눠주고는 소매를 털고 가버렸다. 바다 가운데 들어가서 (섬에)박을 심어 박이 수 만개 열렸다. 그것을 쪼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 몇 천석과 바꾸었다. 곡식을 경강의 마포에 옮겨다가 강촌사람들을 모아서 흙을 쌓아 토실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의 기사에 나옴)-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p.339)

 토정 이지함의 섬과 바다에 대한 인식은 신분관으로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사농공상으로 사실상 어업이나 뱃일은 위 네 신분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천인들이 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다음은 백사 이항복과 나중 인조의 장인이 된 유천 한준겸이 사마초시에 합격하고 회시준비를 하면서 이지함이 기거하던 마포 토정에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면서 강의도 받고 나눈 대화이다. 이항복이 묻기를 “학식이 뛰어난 숨은 인재를 본 일이 있습니까?”하자 토정은 많은 인재를 알고 있다면서도 그 가운데서 최고급의 인물 두 사람과 그다음 인물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한 사람은 항상 바다 위에 있으면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충청도 해상에서 만났는데 10여년 뒤 전라도 바닷가에서 만났다. 뱃짐도 적당히 싣고 운임도 욕심을 부려 받지 않았고, 일찍이 먼 바다에 고기잡이를 가는데 청하여 같이 갔다. 그가 키를 잡고 노를 젓는 것은 다른 어부들이 따를 수가 없었고, 딸이 고기값을 시장 가격의 배를 받자 반값을 되돌려주게 했다.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백사 이상국(항복)이 기록한 바에 나옴) -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p.341)

 두 번째 인물은 예순 가까운 늙은 나이에 책 읽기를 좋아하며 사제의 도리를 다하는 서치무, 세 번째 인물은 서얼 출신의 서기로 가난하고 신분이 미천하나 학문을 좋아해 지함이 재물을 내어 공부를 시켜 나중 혼천의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훗날 서인세력의 중심이 된 이항복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이 때 토정의 답변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듯하다. 토정은 당시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어부와 뱃사람을 최고급의 인물로 꼽은 것인데 이들에게 진정한 관료가 되면 신분을 가리지 말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들어가 필요한 인재를 발굴하고 실용을 배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3) 상소를 통해서 본 섬과 바다의 인식

 평생 재야생활을 한 토정 이지함의 직접 저술은 많지 않다. 말년에 지방관료에 천거돼 맡은 두 개의 상소문과 대인설과, 피지음설 욕심을 적게하는 과욕설 등 간단한 설 세 편, 그리고 운장 송익필의 시를 차운한 시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차운한 시 두 편 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조 1573년 토정 이지함은 조정대신들의 유일이라는 천거제도에 따라 57살 나이에 종6품 벼슬을 받고 포천현감에 부임하게 된다. 6품 이하는 임금이 주는 교지가 아니라 이조판서의 직인이 찍힌 사령장을 받았다. 토정은 비록 하급 지방관료지만 현의 상황과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듯하다. 포천현의 폐해를 진술해 올린 상소문은 이지함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로 평가 받고 있다. 상소문에서 포천현의 실상을 죽음을 앞둔 병든 거지아이라고 표현하고 곡식이 부족한 가난의 원인을 백성의 게으름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구제 방법을 상책과 중책, 하책으로 구분해 지배층의 책임과 도덕성 회복 등 도덕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이 풀어야할 상책, 적재적소 인물 등용 등 인재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과 중앙관료가 해결해야 할 중책으로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다. 다만 포천 현감인 자신이 할 일은 하책인 바다와 육지의 창고를 열어 가난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사업 대안을 제시한다. 즉 가난은 정부의 식량 창고를 열어 구제할 수도 없고 근본적으로 본업으로 여기는 농업에 의존하는 시각을 벗어나 섬과 바다의 무궁한 자원을 활용하고 그리고 광업 상업 등 말업으로 보충하는 등 산업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본말상보(本末相補)론이다.

 "물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萬頃)현에 양초주(洋草洲)라는 곳이 있는데 공(公)에도 사(私)에도 소속된 곳이 없습니다. 만약 이곳을 잠깐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물고기를 잡아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수천 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소금은 황해도 풍천부(豊川府)에 초도정(椒島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공에도 사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을 우선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소금을 구어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또한 수 천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포천현의 창고에 저장해 두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고 관비(官費)를 쓰게 해 원곡(元穀)의 회계에서 영구히 한 섬도 감하지 않는다면 미속(米粟)이 점점 감축될 염려가 없어져 영세(永世)에 항상 풍족한 즐거움이 있겠습니다. 더구나 조처를 잘하면 수만(數萬)의 자본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천이 다른 날 국가의 대보장(大保障:일이 잘되도록 크게 보호하거나 뒷받침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포천이 이미 회복돼 소생한 뒤에는 양초주와 초도정은 또 피폐한 열읍(列邑)에 옮겨주어 포천에서 한 것과 같이 한다면 널리 베풀어 여러 사람을 건지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전게서 p.334)

 만경현 양초주에서 황해도 초도정까지 구체적인 사업 장소까지 열거하는 것은 토정 이지함이 얼마만큼 바다와 섬의 장점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성의 가난구제와 국부를 위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는 반증이다. 상소문에서는 관할주의 폐단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산물은 다만 그 고을에서 취하며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하여 취용(取用)하지 못하게 하니 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타도(他道)나 타관(他官)일 지라도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는데, 포천에는 바다가 없으니 해물을 다른 고을의 경계 안에서 채취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다고 합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전게서 p.333)

 구체적인 사업 실천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고기 잡고 소금 굽는데 부역(赴役)할 사람에 대해서는 자원하는 자를 모집해, 백성과 더불어 이(利)를 나눈다면 국가에서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사람 인부의 힘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만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고을도 백년의 계책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전게서 p.335)

 토정 이지함은 실학의 대표 사상가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 보다 150년 앞선 인물로 정약용이 주어진 법과 제도 안에서 실용주의 개혁을 주장한 반면 토정은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 관할 주의에 얽매인 규제를 풀어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이른바 실용적 개혁 개조론을 폈다.

 또 농업(본업)에만 의존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백성의 삶을 바다와 상공업(말업)을 통해 농업을 보완하고 부를 높여야 하고 필요하면 류쿠(오키나와)와 해상교역을 해야 한다는 조선의 해금정책을 완화해야 한다는 국가정책 개조론 주장을 펴기도 했다. 특히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치유가 힘든 국가적 시혜보다는 지역과 개인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는 자립형 또는 생산적 사회경제복지 정책 등을 제안하고 있다.

 ■ 결론과 현대사회에 주는 시사점

 토정 이지함은 조선시대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해석된다. 토정이 본 구조적 문제는 양민을 농토에 묶어 세금징수가 쉬운 지나친 농업 의존 정책과 사농공상의 폐쇄적 수직적 사회로 보고 있다. 양반으로서 패랭이를 쓰고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닌 천민 행위와 천하게 여겨졌던 바다 섬사람과 서얼을 최고급 인물로 치켜세웠던 행위 등은 당시 폐쇄적인 신분사회에 대한 무언의 도전으로 바라볼 수 있다. 또 사농공상의 고정적이고 수직적인 계층사회에 수산업과 광업 상업을 강조하는 것도 당시 유교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본을 농업과 사농에 두고 말업으로 보충하자는 상보론과 기인의 행각들이 첨예한 대립이나 음모론을 피해갈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어쨌든 토정의 1차 목표는 백성의 빈곤구제에 역점을 두고 있다. 개방성과 역동성으로 상징되는 바다와 섬 상업 광업 수공업 등 당시 지배층의 생각과 정책의 대전환을 강조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현대 한국사회도 헬 조선으로 상징되는 금수저와 흙수저론의 신분과 부의 세습화, 사회 양극화, 대기업의 독점화, 저출산, 고령화 등 관점에 따라서는 조선시대와 유사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는 수직적 신분적 폐쇄성과 지나친 농업의존정책이 문제였다면 현대는 산업화, 도시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빚어진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최근 우리사회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수당 신설을 둘러싸고 '미래를 위한 복지투자다' '표퓰리즘이다'라는 양극화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 여기서 발표자는 이지함이 강조했던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에 주목하고 싶다. 근본과 지엽은 대립이 아닌 서로 보충해야 한다는 점진적 개혁주의 정신이다. 토정 이지함이라면 지금 양극화된 현대 한국사회에 어떤 혜안을 줄 것인가. 이를 해소하는 해법의 하나는 산업화 도시화 정책의 대전환일 것이다. 농어촌 특히 한반도 육지 영토의 5배에 달하는 섬과 바다 연근해 공간을 어떻게 생산적 자립형 공간으로 활용할 것인지? 가고 싶은 섬, 찾고 싶은 섬, 더 나아가 살고 싶은 섬으로 활용할 것인지, 500년 전의 토정 이지함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시 되묻고 있는 것이다.

홍정열 hongpen@pol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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