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통해 ‘노예윤리’ 벗어, ‘싸움닭’에서 대선후보로 떠오른 SNS 전사

[폴리뉴스 정찬 기자] 이재명 성남시장은 진하다. 비주류로서 역경을 헤치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더한 비주류다. 인생이 드라마인 이 시장이 기득권을 향해 던지는 직설적 언어들은 여느 정치인의 수사(修辭)가 아닌 자기 삶의 궤적에 차곡차곡 쌓아온 분노다. 고졸 대통령 ‘노무현’의 진성 버전이다.

이 시장 스스로 “고백하건대 내 운명은 어쩌면 그(김대중)를 너무 많이 닮았다....인간 김대중과 가장 닮은 사람 한 명을 꼽으라면 노무현”이라며 이 두 지도자를 자신의 정치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학력 따위 내세울 게 없는’ 두 정치인에 감정이입 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고인이 된 이 두 정치인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 “왜 한국 유권자들은 굳이 이 ‘못난 사람들’을 민주정부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생각해보면 그 까닭은 간명하다. 바로 자신들의 말 못할 슬픔과 쓰라린 고통과 남몰래 흘린 눈물을 닦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터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민주정부야말로 대속의 정치, 인간의 정치학이라는 걸 나눈 두 사람을 통해 깨달았다”고 했다.

이어 “가난했고, 학교도 제 뜻 품은 대로 다닐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넘어설 꿈이 있어야 했다....그건 대중의 꿈이기도 했다”며 “나는 말하곤 했다. ‘김대중, 노무현은 방화범이야’ 그건 야유가 아니라 그들의 말에 불타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서 내뱉는 최고의 상찬”이라고 했다. 김대중-노무현이 ‘방화범’이 된 것은 자신이 가난 속에서 꾼 꿈을 이들이 먼저 실천했기 때문이리라.

초등학교 생활은 ‘공포’, 도서관이 유일한 도피처

이재명은 1963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봉화군 재산면, 안동군 예안면 3개 군이 만나는 접경지대 청량산 자락인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신고는 1여년 늦어 호적상으로는 1964년생이다.

1931년생 동갑내기인 부친 이경희, 모친 구호명의 5남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만 위로 두 누나가 일찍 죽어 살아남기로는 다섯째였다. 부친 이경희씨는 일반 하사관으로 공군을 제대한 뒤 뒤늦게 야간학교와 청구대학을 다니다 그만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 관리자 노릇도 하고 잠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시장의 부친은 당시로서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생활력에서는 무능했던 모양이다. 이 시장은 자서전에서 안동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게 된 배경과 관련 “음주가무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남아 있던 재산과 가솔이 모두 나서서 돌을 집어내어 일군 산전마저 털어먹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대 마침내 몸을 빼쳐 서울로 가버렸다”고 다소 원망이 담긴 어투로 말했다.

아버지의 상경에도 이 시장은 삼계초등학교(지금은 월곡초등학교 삼계분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닌 후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게 마친 초등학교 시절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선생님은 무서웠다. 언젠가 담임선생에게 코피가 흘러 얼굴을 적시는 데도 뺨을 27대나 맞았다. 당시 그는 자신을 때리던 선생에게 반항기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고 했다.

사연은 집에 돌아가 해야 할 일들 생각에 선생의 지시를 잊은데 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도 도맡았다. 가난으로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긴 탓이 크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대해 “내게 학교는 수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미였다. 아니 공포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포’ 속에도 ‘한 가지 좋은 것’으로 ‘도서관’을 얘기했다. 이곳에서 ‘암굴왕’, ‘지하세계’, ‘해저 2만리’ 등 아동용 도서를 읽는 것이 “유일하게 몇 시간 평화가 유지되는 나의 도피처이자 자아의 자궁”, “내 영혼의 생성소이자 고향”이라고 했다.

지금 이 시장이 어린 자신을 길러낸 초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촛불광장이 된 광화문에 도서관을 짓겠다는 꿈을 밝히고 있다. 그는 저서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이 세상에서 꼭 한 가지만 한다면, 나는 광화문광장에 도서관을 짓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광화문이고 싶다, 나는 도서관이고 싶다. 나는 광장이고 싶다. 나는 세상의 꿈이고 싶다”고 했다.

이름 없던 소년 공돌이 이재명, 자살 시도할 정도 좌절감 겪어

이재명 시장이 소년 노동자 시절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앞줄 제일 오른쪽]
▲ 이재명 시장이 소년 노동자 시절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앞줄 제일 오른쪽]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온 이재명은 13살 나이인 1976년 ‘소년 노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첫 직장은 ‘이름 없던 가내공장’, 월급 1천원이었고 납땜일을 했다. 두 번째 취직은 햇빛조차 들지 않는 이름 없는 ‘반지하 가내공장’이다. 월급을 3천원 받기로 했으나 사장이 야반도주하면서 5개월 일했지만 3개월 치 월급을 못 받았다.

이재명은 이후 콘데서용 고무를 만드는 ‘동마고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의 이름은 있었지만 이재명은 이름이 없었다. 법적으로 고용될 수 없는 소년이었기에 나이든 지인(知人)의 이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년 노동자의 목숨보다 ‘기계 값’을 더 무서워했던 그 시대에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야근, 잔업, 철야를 일삼았다.

이재명은 이곳에서 작업대 전기모터에 손가락이 말려들어가 손가락과 고무가 떡이 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장은 “기계 값이 얼만데?”라고 핀잔했고 치료기간 동안 품삯도 못 받았다. 상처부위 피부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갈 정도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또 일했다.

네 번째로 위장취업(?)한 곳은 셋째형 이재선 이름으로 들어간 아이스박스를 만드는 ‘아주냉동’이었다. ‘샤링기(절단기)’에 손가락이 날아가는 공장이었다. 이재명은 ‘군기잡기’ 명목으로 행해지는 선임 노동자의 ‘폭력’, ‘소년 노동자들 싸움 붙이기’ 등을 겪으면서 ‘탈출’을 꿈꿨다.

그는 다음으로 야구 글러브와 스키 장갑을 만드는 대양실업에 월급 1만3천원의 프레스공으로 들어갔다. 이때가 열다섯 나이였다. 이곳의 프레스가 이재명의 손목관절을 으깼다. 그러나 치료도 하지 않았다. 당시는 산업재해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붓는 정도의 부상은 병이 아니라고 하던 때라 속으로 뼈가 으스러지고 통증이 심한 상태에서도 프레스를 돌렸다.

그러나 열여섯 살 때 키가 부쩍 자라면서 으깨진 손목뼈 때문에 한쪽 성장판이 깨져 손목 관절과 함께 팔이 굽게 됐다. 이재명은 몇 년 후 징병검사장에서 자신의 불구를 확인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이재명은 고입 검정고시를 마쳤다.

대양실업이 망하자 이재명은 열일곱에 오리엔트 시계공장에 입사했다. 이 시장이 이곳에서 지난 1월23일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 대통령이 되겠다’며 대선출마를 선언한 것은 이러한 인연에서였다. 이곳에서 그는 일과 함께 공부도 병행했다.

‘학생’이 되고 싶었던 이재명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상당히 공부에 열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주변 선임 노동자로부터 질시 내지는 악담도 들었다. 자신에게 수시로 악담하던 한 노동자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재명은 자신을 미워하던 노동자의 죽음에 일하는 중 마냥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꿈을 꾸지 못하는 좌절된 현실’에 대한 동변상련이었다.

1980년 4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재명은 아버지가 “공부는 무슨...”이라며 못마땅해 했지만 독학과 한 학원원장의 도움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1981년도 학력고사서 2천등 내에 들어 서울대 법대 등 상위학과는 어렵지만 일반학과에 입학할 성적이었으나 돈을 받으면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중앙대 법학과에 1982년에 입학했다.

이재명은 자신의 저서에서 6년 소년 노동자 시절을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당시 자신이 겪은 좌절과 고통을 시(詩)로 표현했다. <차렷이 안 되는 사내> 시에서 ‘굽은 팔’의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로 바라보며 “어느 날 연탄마저 나를 배신했다./ 다락방에 올라가 피운 연탄불은 알아서 꺼졌다./ 수면제도 나를 반역했다.”고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했다.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좌절감’과 ‘자기혐오’를 시로 건너뛰었다.

‘386’보다 ‘소년공’ 정체성의 이재명, ‘광주’ 통해 ‘노예윤리’ 벗어

이재명은 82학번 ‘386’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생경해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저서에서 “(나는) 이른바 82학번이다. 나는 학생들 모두 즐겨 사용하는 ‘학번’이라는 말이 너무 낯설었지만 표를 내지 않았다. 그건 소년공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청년들만이 사용하는 선민적 용어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고 했다.

대학 4년 동안 고무신을 줄기차게 신고 낡은 코트와 교련복을 줄기차게 입은 것에 대해 이재명은 친구들이 감옥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지만 ‘소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동년배 386 중에는 공장으로 간 학생들도 있었다. 소년 노동자 출신인 이재명이 이들을 어떻게 바라봤을 지가 궁금하다.

이재명은 학생운동에 앞장서자는 절친한 친구의 제안에 공부를 해 법조인이 되면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지켰다. 그는 친구들의 활동에는 존경을 표했지만 그 자신은 대학에서 다른 ‘진짜 공부’를 했다. 이재명은 “나에게 대학시절은 진짜 대학이었다”면서 “거기서 내 삶을 발견하고 변화했다. 그때 깨달은 공리가 내 삶의 원리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장 다니는 동안 오로지 맞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언젠가 성장한 뒤에는 나도 때려가면서 권력을 부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게 고작이었다. 그게 노예의 윤리라는 걸 완전히 깨우쳤다”고 했다.

이재명에게 ‘진짜 공부’를 시킨 것은 ‘광주’였다. 그는 저서에 “5월 광주는 나의 사회의식을 비로소 단련시켰다.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주는 나의 구원이었고 스승이었고 내 사회의식의 뿌리였다. 나를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지녔던 ‘노예윤리’의 굴레를 벗긴 것이 ‘광주’였다.

사시 합격, 인권변호사에 시민운동가에서 성남시장으로 재선

이재명 시장은 사법연수원 졸업후 곧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인권변호사의 길로 나섰다.
▲ 이재명 시장은 사법연수원 졸업후 곧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인권변호사의 길로 나섰다.
1986년 사법시험(28회·연수원 18기)에 합격해 1989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했지만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갔다. 이에 대해 이재명은 “성적을 떠나서 나는 이미 판사도 검사도 할 수 없었다. 인권변호사를 하겠다고 주변 동료들에게 너무 설레발을 쳐 놓았던 터다. 사태는 회복불능이었다”고 했다.

사법연수연 동기였던 문병호, 최원식 전 국민의당 의원,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공부모임을 함께 한 이재명은 문병호-최원식 부평, 정성호 의정부, 이재명 성남 이렇게 서울이 아닌 지역에 가자고 한 약속을 이행했다.

1990년에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인근 이천시와 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과 민변모임 활동을 했다. 바로 이 무렵 서울 출생의 숙명여대 피아노과를 나온 김혜경씨 만나 연애를 시작해 1991년에 결혼했다.

이재명은 부인 김씨와의 만남에 대해 “내가 처음 들어가 본 아파트가 처갓집이었다. 장인은 서울시립대를 나왔고 아내의 오빠는 미 스탠퍼드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고 했다”며 “나는 그 무렵 피아노가 있는 집 딸과 피아노를 만져본 적 없는 청년이 만났다는 걸 실감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딴판인 세상을 처음 겪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1995년에 이재명은 성남시민모임(2005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로 개명)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장은 이후 ‘수도권남부저유소 수도권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1995)으로 활동했고 성남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2000년) 사건과 관련해선 3년간이나 지역 국회의원, 정당 간부, 경찰 간부와 맞서 싸웠다.

2002년에는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고 성남시립병원 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시립의료원 설립청원 운동을 주도했다. 2004년에는 성남시의회가 주민청원으로 만든 주민조례를 부결시킨데 항의하면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수배되기도 했다.

당시 이 시장은 시민들의 청원이 새누리당 의원이 다수인 시의회에서 부결되는 일을 겪은 뒤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 때가 2004년이다. 이후 2006년 지방선거에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2008년 총선에서도 성남 분당에 전략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세 번째 도전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이재명은 민선5기 성남시장으로 당선됐고 2014년 지방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했다.

‘싸움닭’에서 대선후보로 떠오른 SNS 전사

이재명 시장의 별명은 싸움닭이다. 비주류 출신으로서 기득권과 맞선 그는 싸움닭이 되는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이재명 시장의 별명은 싸움닭이다. 비주류 출신으로서 기득권과 맞선 그는 싸움닭이 되는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재명 시장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싸움닭’이다. 좌충우돌 거리낄 것 없이 기득권 내지 주류세력과 날을 세우며 부딪혀온 그를 잘 표현하는 단어다. 이 시장 스스로도 자신을 ‘싸움닭’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최근 톡 쏘는 ‘사이다 발언’을 줄였다지만 ‘싸움닭’이란 그의 이미지는 쉽게 희석될 것 같지 않다.

민선5기 시장 취임과 함께 이 시장은 ‘싸움닭’의 면모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중앙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성남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이다. 이를 두고 정부와 여당, 언론이 합심해 전임 시장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선동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후 3년 6개월 만에 부채를 청산했다.

이 과정에 이 시장은 고만고만한 기초단체장에서 국민들의 시선을 받는 ‘전국구’로 성장했다. 2014년 6월 재선에 성공한 이 시장은 화제와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이슈 메이커’였다. 특히 SNS의 파급력과 결합하면서 정치적 위력도 배가됐다.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및 산후조리지원’ 등의 성남시 정책은 하나하나가 정치적 논란이 됐다.

당연히 진보층의 가슴을 달구는 아이콘이 됐고 보수층으로부터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급기야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당 공식회의에서 이 시장을 비판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 시장은 여권의 공격을 ‘싸움닭’답게 오히려 즐겁게(?) 맞받았다. 그렇게 이 시장은 야권의 SNS 전사(戰士)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 상반기 무렵 성남시 복지정책과 정부와의 지방재정개편안을 둘러싼 갈등 등 성남시의 정책현안이 ‘전국적인 이슈’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 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싸움닭’이다. 이 시장은 이 별명에 “반골 기질 가득한 비주류 아웃사이더가 머리가 되긴 어려우니 꼬리라도 잡아 몸통을 흔들어야지요”라며 반겼다.

당시만 해도 이 시장은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대권도전에 나서겠다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권력의지를 보이는 수준이었지만 2016년 10월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10월24일 밤 JTBC의 최순실 태블릿피시 보도 이후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을 때 이 시장은 바로 그 지점에 가장 적합한 ‘싸움닭’이었다.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했고 국회에게는 탄핵소추를 요구했다. 당시 이 시장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답답해하던 국민에게는 시원한 ‘사이다’였다. 그리고 이 시장의 요구대로 국회는 지난해 12월9일 마침내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그렇게 ‘기회’가 이 시장에게 찾아온 것이다. 11월에 들면서 이 시장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그 기세는 12월 초로 넘어가면서 당시 문재인-반기문 양강구도를 뒤흔들었다. 지난해 12월9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 시장은 18%의 지지율로 문재인 전 대표(20%)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20%)에 바짝 추격했다. 탄핵국면 중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이 시장 뒷전으로 밀렸다.

박 대통령 탄핵 이후 이 시장의 지지율은 다소 꺾였지만 핵심 지지층은 견고해졌다. 탄핵 이후 약 2달 가까이 지지율이 빠졌지만 바닥을 8%선 내외로 다졌다. 이른바 ‘이재명 세력’의 핵심코어가 창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재명 세력’은 비주류 아웃사이더 대선후보에 열광하고 공감하는 집단이다. 이들이 이 시장의 우군 ‘손가락 혁명군’이다.

민심의 기세에 올라탄 이재명 시장은 올 1월23일 자신이 소년 노동자로서 마지막에 근무했던 성남 중원구 오리엔트 시계공장에서 대선 출마 출정식을 가졌다. 그는 대선출마 선언에서 “소년 노동자가 오늘 바로 그 참혹한 기억의 공장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출신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자식을 공장을 보내고 울어야 했던 어머니, 광부로, 일용노동자로 일하다 다리를 절단한 큰 형,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누나, 청소회사 직원인 둘째형,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동생 등 가족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1970년대 이촌향도를 불가피하게 택한 대한민국 서민들의 집단기억을 되살리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싸움닭’이 된 데 대해 “저의 모든 판단과 행동과 정책은 제 삶의 경험과 가족 이웃의 현실에서 나온다. 약자의 희생으로 호의호식할 수 없었고, 빼앗기지 않고 누구나 공정한 환경에서 함께 잘 사는 것이 저의 행복이기 때문에 저는 저의 행복을 위해 싸웠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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