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 KING KIM'. 경주시 노동동 출신 이민 1세대 김경선의 이름조차 잘못 새겨진 콘크리트 묘비는 독립운동사에서 마저 소외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신세를 하소연하는 듯 했다. 

지난 2016년 6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 취재를 위해  L.A.와  '중가주'로 불리는 미국 중부캘리포니아 일대를 취재할 기회를 가졌다. 김경선이 묻힌 다뉴바(DINUBA)시는 낯선 지명이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바로 '딴유바' 삼일절 기념식은 1920년 전세계 최초의 3.1운동 기념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미주 초기 이민 한인들이 당시 식민 신세인 고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만세운동 1주년을 먼 타향에서 기념한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1981년, 5.18 1주년을 눈물과 한숨으로 맞아야 했듯이 일제의 폭압 아래 숨 죽였던 조선의 만세운동 기개는 미 대륙에서 영상기록과 현지 신문의 보도로 생생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뉴바를 '딴유바'로 부르던 당시 한인 중 상당수는 하와이 농업이민자 출신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던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 팔도에서 모인 7500여명은 제물포항에서 갤릭호, 몽골리아호 등 이민선을 타고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과 관심에는 이들의 이후 행적이 그리 많지 않다. 미국 이민국은 계약기간이 끝난 조선인들에게 선택권을 줬다. 귀국과 하와이 잔류, 그리고 미 본토 이주. '망국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동기를 비롯해 1904년부터 이듬해까지 샌프란시스코항을 통해 2천11명이 대륙에 발을 디뎠다.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의 '쿨리'와 마찬가지로 대륙횡단철도 공사현장과 광산에서 막노동에 종사했다. 과일과 채소 산지였던 다뉴바와 리들리(REEDLEY)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은 시급 20~30센트의 저임금으로 생활비가 월 10~15달러에 불과한 최하층 과일 수확 날품팔이였다. 

하지만 다뉴바와 리들리가 '미주 한인 이민역사의 성지'로 불리워지게 된 이유는 바로 상해임시정부의 주요 자금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난한 주머니에서 매달 수입 10% 안팎의 달러가 '혈성금' '공채금' '독립의연금'이란 이름으로 조국독립운동에 기부됐다. 이곳 교민사회는 1920년 무렵에는 3.1절 1주년 기념식을 열 만큼 상당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 주류사회로 진출한 경우를 제외한 상당수는 1934년 4월 28일, 59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경선처럼 비참한 생을 이어갔다. 계절노동자로 노동력이 다한 이들 '상해임정의 자금원'은 대부분 독신으로 곤궁한 삶을 마쳤다. 현재 다뉴바와 리들리 공동묘지에는 247명의 한인 이민1세대가 쓸쓸히 묻혀 있다.

미국 중가주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면에는 이승만과 안창호의 뿌리 깊은 대립이 드러난다. 다뉴바와 리들리 한인들은 이승만의 동지회, 안창호의 국민회로 나눠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 리들리 출신들의 고국 방문을 불허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우파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명망가들의 대립은 이름 없는 '장삼이사 독립유공자'들의 신세를 살아 생전의 당대는 물론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처를 남기고 있다.             

2019년의 새해 3개월을 달려온 '3.1운동 100주년 기념 캠페인'이 며칠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광화문 기념식을 계기로 정점을 찍었다. 그동안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했던 삼일절 국가 캠페인을 바라보는 내내 불안감은 그치지 않았다. '혁명' '촛불' '청년운동'의 키워드는 견강부회의 정치적 냄새는 났지만 엄연한 당대적 견해요, 평가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3.1운동이 한국사회를 좀 먹고 있는 좌우 대립의 새로운 전장이 될 수도 있다는 노파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한국사회는 2015년을 비롯해 역사교과서 논쟁을 거듭할 때마다 우파와 좌파가 각각 외교론자와 무장투쟁론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에서도 대립해왔다. 우파는 '80년대 민주화 이후 좌파가 득세해 무장투쟁사를 지나치게 부각시켰다'는 비판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 모 방송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약산 김원봉의 걸개사진을 내걸자 반발한 것도 그 연장에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입장일뿐 약산이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지도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북을 택했다고 독립운동사에서 마저 이름을 지울 수는 없다. 

몽양 여운형의 좌우 합작의 꿈은 1947년 총탄에 좌절됐다. 3.1운동이 아직까지 좌우의 언어 난사가 가득한 한국사회에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이제는 알 때도 됐다. 러시아의 레닌이 '전세계 제국주의 중 가장 극악하다'고 했을 정도였던 일본의 탄압을 이겨낸 민족이라면 서로 헐뜯고 싸우는 근성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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