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내는 6자회담 재개 원치 않아, ‘제2의 고난의 행군’ 각오도 담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 극동연방대학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 극동연방대학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후 북한이 남·북·미를 핵심 축으로 하는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벗어나 ‘6자회담’을 통한 새로운 접근법, 즉 ‘플랜B’의 가능성을 열며 비핵화 협상에서의  대미·대남 압박을 위한 새로운 동력 확보에 나섰다.

지난해 4월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과 북미,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비핵화 여정에 들어섰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이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은 4월 25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남·북·미 축 중심의 비핵화 협상 판을 중국·러시아·일본까지 참여시킨 ‘6자회담’으로 판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5일 북·러 정상회담 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에서 가진 단독 기자회견에서 “한국이나 미국이 (북한체제) 보장조치들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다면 6자회담 가동이 안 될 수도 있지만, 한국과 미국의 보장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 “6자회담은 결과적으로 이뤄져야 되는 상황이고, 북한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으며 다만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체제 안전보장은 국제적인 보장 체계가 필요한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며 6자에 의한 다자 간 안보보장체계 구축을 얘기했다. 그간 한반도 정세변화에 소외됐던 중국·러시아·일본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푸틴 대통령의 이번 북·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미국에도 결과를 말할 예정이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의향이 있다”며 “내일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에게도 (북러 정상회담 결과를) 말할 예정”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협상 판의 새로운 플레이어로서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북한은 6자회담 재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않았다. 다만 푸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미국에게 ‘6자회담 카드’의 존재를 얘기했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지렛대로 자신에게 일방적인 굴복을 강요했다고 판단한 북한이 지금의 북미 톱다운 방식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언제든 ‘6자회담’으로 갈아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또 북한은 ‘제재’보다는 ‘체제 안전보장’ 쪽으로 방점을 옮겼다. 하노이 회담 결렬의 교훈이다. ‘제재 완화’를 핵심 의제로 다루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대북 제재’만이 유일한 대북 압박수단으로 인식케 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에 다시 ‘체제 안전보장’이란 원론으로 복귀해 전열을 재정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러 정상회담 다음 날인 26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들은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조·로 두 나라가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한 여정에서 전략적 의사소통과 전술적 협동을 잘해나가기 위한 방도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했다”며 “쌍방은 앞으로 서로의 이해와 유대를 더 밀접히 해나가며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한 전략적인 협동을 강화해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 판에서의 러시아의 역할이 강화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미 톱다운 협상에 대한 끈도 놓지 않았다. 압박의 수위는 높였지만 미국에게 ‘일괄 타결’, ‘빅딜’ 고수의 입장에서 벗어나 ‘단계적 방식’으로 협상을 풀어야 한다는 주문의 성격이 강했다.

<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 협상과 관련해 “제2차 조미수뇌회담에서 미국이 일방적이며 비선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최근 조선반도와 지역정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지경”이라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전적으로 미국의 차후태도에 따라 좌우될 것이며 우리는 모든 상황에 다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매체들은 전날 푸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제안한 6자회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북·러 사이의 안전보장 협력을 미리 강조해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어그러질 경우 언제든 ‘체제안전 보장’ 명목으로 중국·러시아 등을 비핵화 협상 판에 개입시킬 수 있다는 함의를 내포했다.

北 6자회담 재개 원치 않아, ‘6자회담 재개’ 北의 ‘제2의 고난의 행군’ 각오 의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4일 새벽 북러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로 출발하기에 앞서 환송식을 가진 모습.[사진=연합뉴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4일 새벽 북러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로 출발하기에 앞서 환송식을 가진 모습.[사진=연합뉴스]

북한의 ‘플랜B’는 하노이 회담 결렬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의 올해 신년사에서도 그 일단을 드러낸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해 항구적인 평화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때는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북미협상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체제 안전보장’ 도모의 길로 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 순차적인 프로세스로 간주한 ‘다자협상’인 ‘6자회담’을 전면에 내걸어 미국을 압박했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북한이 받은 충격은 만만치 않았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회담 결렬 후 중국과의 회담 결과 조율도 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귀환해 ‘중국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까지 드러냈다. 그리고 3월 15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통해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중단을 고려한다는 뜻도 밝혔다.

그만큼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한 충격이 컸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대북제재 문제가 자신의 약점으로 노출된 대목을 뼈아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 충격을 추스르면서 중국이 아닌 러시아를 새로운 조력자로 선택했고 미국에게 ‘일괄타결’이 아닌 ‘새로운 계산법’으로 3차 북미정상회담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3차 회담 용의를 밝히면서도 “미국이 지금의 정치적 계산법을 고집한다면 문제해결의 전망은 어두울 것이며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의 ‘빅딜’ 협상방식에 대해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며 “미국은 그러한 궁리로는 백번, 천번 우리와 다시 마주앉는다 해도 우리를 까딱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대북 제재에 대해선 “적대세력들의 제재돌풍은 자립, 자력의 열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고 ‘자력갱생의 기치’도 높이 들었다.

올 연말까지 미국이 ‘일괄타결’과 ‘대북제재’를 통한 압박을 거두지 않을 경우 한반도 비핵화 협상 판을 ‘6자회담’으로 옮겨 장기전으로 임하겠다는 경고다. 이는 2년도 채 남지 않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의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협상의 방점을 ‘제재’보다는 ‘체제안전 보장’으로 선회한 것도 6자회담 대비용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과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쌍중단 쌍궤병행’ 원칙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축소되고 북한도 추가 도발을 감행하지 않는 ‘쌍중단’ 상황에는 도달했다고 보면 쌍궤(비핵화와 평화협정) 추진은 ‘6자회담’을 통해 진행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다. 이 경우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 완화’를 주장할 가능성이 높아 미국의 ‘대북제재 공조전선’에도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북·중, 북·러 간 국경무역도 조금씩 숨통을 틀 수 있다. 게다가 ‘6자회담 재개’ 카드에는 북한이 미국의 ‘대북제재의 장기화’에 맞서 ‘자력갱생’의 기치로 ‘제2의 고난의 행군’도 감행하겠다는 결의까지도 담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은 ‘6자회담 재개’를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6자회담으로 틀을 바꾸더라도 비핵화 협상의 키는 미국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6자회담으로 넘어갈 경우 러시아·중국·일본의 이해가 겹쳐져 문제가 더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6자회담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의도는 미국이 이른바 ‘새로운 계산법’으로 북미협상에 임해달라는데 있다. 그래서 대남, 대미 협상을 주도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통일전선부장 자리에서 경질하고 그러면서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 등 외무성 라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6자회담 카드’를 내비친 북한의 속내는 3차 북미정상회담에 있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다만 미국이 계속 일방적으로 나올 경우 제재의 장기화에 따른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고 ‘6자회담 재개’로 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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