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손보사의 홍보 담당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재벌 가문의 오너 승계가 안고 있는 어두운 단면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요약하면 '창업자의 2세와 3세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대기업이 홍보에 물량공세를 퍼붓는 관행이 굳어지다 보니 전혀 관계 없는 회사들까지 기존의 홍보 마케팅 기조를 바꾸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면 한국에서는 홍보에도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재벌의 오너 승계를 무조건 싸잡아 비도덕적, 반경영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그들 중에는 엄격하고 혹독한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어릴 때부터 경영자 수업을 탄탄하게 받고 가업을 성공적으로 이어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최근 한국사회를 소란스럽게 한 3세들의 일탈을 재벌을 바라보는 창으로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패리스 힐튼을 비롯해 거대 상속자 중에는 어느 장삼이사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천덕꾸러기들이 꼭 끼어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태어난 재벌 2세, 3세들의 가치관이다. 그들은 자신을 바로 보는 사회의 시선을 더 의식해서라도 창업 선대보다 더 철저한 기업가정신과 경영능력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실천가가 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가경제를 넘어 한국사회의 최대 난제가 된 일자리, 즉 고용문제를 놓고 두 재벌 후계자 간에 드러난 신뢰성의 격차는 시사하는 바가 여러 모로 크다. 

최근 'CEO스코어'는 이달초 기업들의 사업계획서 공시를 분석해 '60대 대기업집단 고용증가 톱30 그룹' 현황을 공개했다. 그 결과 대기업 중 1위는 CJ그룹으로서 2017년 직원수가 2만1133명에서 2018년 3만2735명으로 54.9%(1만1602명) 증가했다. 특히 CJ의 고용 성과는 계열사인 CJ프레시웨이가 간접고용했던 급식점포 서빙 및 배식 보조 직원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한 결과여서 의의가 더욱 도드라졌다. 물론 단순히 이 수치만으로 기업의 복잡한 고용문제를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해서도 안 되지만 CJ가 수년전 사회에 미친 파장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그동안의 우려가 꺾인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국민들은 당시 구속된 이재현 회장이 듣도 보도 못한 희귀병에 걸렸다고 했을 때도 휠체어에 의지한 처참한 행색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한보의 정태수 회장을 비롯해 여느 재벌회장들처럼 법원의 형집행정지 결정을 노린 '시한부 쇼'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최근 경영 활동을 재개한 그가 당시 겪은 고초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여전히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의 고용 성과에서 CJ와 이재현 회장이 한동안 한국사회에 던진 실망과 상실감을 상쇄시키고 재벌의 후계 승계 우려를 불식시킬만한 자세를 보여줬다는 시각들이 곳곳에 확인된다. 이 회장 체제 CJ그룹의 주력 업종이 식품과 서비스 등 국민의 신뢰에 의해 경영이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성과가 고용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확인되기를 기대해본다. 

반면, 신세계그룹은 이번의 고용 평가로 가장 큰 질타를 받고 있는 사례이다. 특히 이번 결과는 고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 이명희 회장의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의 평소 이미지 외에도 일국의 경제부총리가 참석한 자리에서 허언을 한 결과가 됐다는 점에서도 큰 실망을 주고 있다. 정 부회장은 2014년 이후 인문학 특강을 직접 하고 인문학 증흥을 사회공헌사업으로 내세우면서 국민에게 재벌3세로서 안정된 이미지를 얻어 왔다. 그래서 회사가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하남 스타필드 개장식에 당시 김동연 경제부총리까지 참석시켜 약속한 '1만명 고용'은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1만5000여명을 고용했는데 그 절반인 7000여명이 스타벅스의 종업원이었다. 그것도 이직률이 높은 커피체인점의 특성 상 고용증가는 훨씬 못 미친다는 언론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인문학의 요체가 사람과 도덕, 그리고 공존의 가치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용진 부회장에게 이번 일이 재벌 후계자의 기업가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지난 2014년 대한항공의 조현아 땅콩 회항 사건 무렵 포스텍의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는 '21세기 미래 엘리트 생성매커니즘'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이제는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스웨덴의 150년, 5대 후계자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이 모델로 제시됐다. 이 회사의 오너 자격은 '자력으로 명문대와 해외유학,  해사를 졸업한 해군 예비역 장교'이다. 가문의 신조는 'Esse, Non Vider',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이다. 재벌, 특히 후계자는 기업경영 일선에서 묵묵히 일하며 성과를 내면 스스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늘 국가경제와 국민 곁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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