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동구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동구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폴리뉴스 이지혜 기자] 5.18 39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당시 발포에 살상된 사람들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은 끊임없이 폄훼당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계엄령 해제’를 외치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날부터, 전남도청에서 150여명의 시민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인 ‘도청진압작전’까지 열흘 간 이어졌다.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는 잔인한 국가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자신과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승리한 것이다. 또한 치안체계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도덕성을 바탕으로 공동체와 치안체계를 유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한 글에서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광주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스스로 정의로운지 되묻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광주의 비극은 처절한 죽음들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두개의 자각과 한개의 의무를 남겼다”며 “첫번째 자각은 국가폭력에 맞선 사람들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며 “두번째 자각은 국가의 폭력 앞에서도 시민들은 엄청난 자제력으로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남겨진 의무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광주정신’이라며 “1980년 5월의 광주가 민주주의의 촛불이 됐다”고 언급했다. 

최근 당시 광주와 관련된 사람들이 군인들이 자행한 헬기 사격, 시신 소삭, 성범죄 등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미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김용장 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광주를 방문해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열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본다. 

전남대생들이 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 전남대생들이 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신군부의 탄생과 계엄령의 전국 확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노태우 등 군 내부 하나회(육사 11기 친목 모임) 출신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12월 12일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켜 육군본부, 국방부, 특전사 사령부 등을 점령했다. 이들은 군의 공식지휘계통을 장악한 ‘신군부’가 됐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이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 움직였다. 그리고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전국의 주요대학들이 학생회를 구성하고 학원민주화투쟁을 벌였다.

학생회들은 5월부터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나아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을 외치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나섰다.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실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갖고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요구’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광주에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화성회’를 가지고 비상계엄의 해제를 요구했다. 이들은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갖기로 하고 해산했다. 

신군부는 신민당이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 등을 제출하는 등 계엄이 해제될 위기감을 느끼자 무력을 통한 정면돌파를 꾀했다. 이들은 먼저 17일 오후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을 급습해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연행했다.

결국 임시국무회의가 17일 밤 11시 40분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선포함에 따라 ‘계엄포고 10호’가 발표됐다. 모든 정치활동은 중지됐으며, 대학은 휴교해야했고,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의 비방이 금지됐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연행했다. 

신군부는 서울·부산·대구·광주 등에 군대를 투입했다. 서울에는 1·3·5·8·11·13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55대대가 배치됐다. 

 

공수부대원이 학생을 곤봉으로 내려치려 하고 있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 공수부대원이 학생을 곤봉으로 내려치려 하고 있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늘어나는 공수부대원과 무자비한 진압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 정문을 통제했다. 앞선 14일 만약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오전 10시 학교 교문 앞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해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던 학생들은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계엄군의 통제와 귀가 종용에도 불구하고 10시까지 남아있던 100여명의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의 수가 3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공수부대원들은 진압을 시작했다.

부상자 십여명을 남기고 해산한 학생 300~400여명은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해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강제해산시키는 한편, 오후 4시경부터 도청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강력한 시위진압을 실시했다. 이들은 시위 가담 여부를 불문하고 금남로 및 카톨릭센터,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구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쫓아 민가에까지 들어갔다. 젊은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연행했다. 

신군부는 18일 오후 광주에 11공수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광주 시민들은 19일 사태를 살피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오전 10시경 금남로의 군중은 2000~3000명에 이르렀다. 경찰과 공수부대는 이들에게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 해산에 나섰다. 전날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은 어제와 같은 폭력적 시위진압을 이어갔다. 이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 현장 주변의 건물과 집을 뒤지고 젊은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구타한 뒤 연행했다.  

정웅 31사단장은 광주 소식을 듣고 무혈진압을 명령했으나 신군부는 더욱 강력한 시위진압명령을 내렸다. 또한 신군부는 3여단 5개 대대를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총 34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민군이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 시민군이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분노한 시민들과 국가폭력에 대한 승리

분노한 시민들은 20일 아침부터 시내로 몰려들었다. 20일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자 경찰은 최루탄을 터뜨리며 해산을 시도했다. 다시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이 시작됐고 시민들은 그 수를 늘려가며 저항했다. 

택시운전사들도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저녁 7시쯤 200여대의 자동차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금남로로 이동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부수거나 운전기사들을 끌어내 구타했다. 

시위대는 공용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와 합세하며 계엄군을 압박했고, 계엄군 저지선은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는 데에 분노해 광주 MBC와 KBS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자 3공수여단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조선대학교와 광주세무서에서도 발포가 이뤄졌다.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하고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오후 1시,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를 신호로 시민들을 향해 ‘엎드려 쏴’ 자세로 무차별 발포를 자행했다. 발포는 약 10분간 이어졌다. 이 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를 종합해볼 때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으로 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을 받아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확보했고, 그 외 각 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획득했다. 

무장한 시민군은 광주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은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했다. 시민군 전투지도부는 10명씩 조를 나누고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 시민군은 저녁 8시경 도청에 진입하면서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 전 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광주 시내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에 나선 광주시민들 <사진=5.18 기념재단>
▲ 광주 시내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에 나선 광주시민들 <사진=5.18 기념재단>
시내 장악을 위해 화정동 '돌고개'를 넘고 있는 공수부대 전차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 시내 장악을 위해 화정동 '돌고개'를 넘고 있는 공수부대 전차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민주공동체’ 광주의 자발적 치안회복...27일 ‘최후의 항전’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도시를 청소하고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실질적 대민업무를 맡았으며 유지급 인사들이 모인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측과 협상활동을 했다.

치안이 약해진 시기였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기간 발생한 범죄율이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있었다. 

계엄군은 광주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하고 광주를 봉쇄하는 한편,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조작보도하며 사건을 은폐시켰다. 또한 정보요원을 보내 교란작전을 펴는 등 방해활동을 이어갔다.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군은 비상령을 내렸으며, 이성학 장로와 김성룡 신부는 탱크가 진입하는 농성동으로 달려가 길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도청에는 최후까지 항전할 150여명이 남았다. 공수부대 특공조는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해 27일 새벽 3시와 3시 30분 경 각기 도청, 전일빌딩 , YWCA 등에 침투했다. 3, 7,11공수여단은 작전이 시작되기 전 광주시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를 두절시키고 시내전화선을 모두 차단했다. 

박영순 씨와 이경희 씨는 홍보 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 시내를 돌면서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가두방송을 했다.

특공조는 도청을 포위하고 발포했다. 오전 5시 10분경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관관호텔 등이 완전히 진압당했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항전은 끝났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 폭도’ 등으로 분류돼 군부대로 이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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