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사태로 인해 한중일, 동북아 3국에 엄습한 공포감은 날을 더 할수록 그 국민들만큼이나 최고 권력자와 집권당에게도 위협적이다. 특히 이번 유행병의 종주국인 중국은 영웅적인 의사들의 잇단 죽음에 대한 인민의 추모 물결이 반체제의 대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시진핑의 마스크까지 벗겼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우한에서 발생한 역병을 은폐한 만큼이나 큰 패착의 첫 단추는 의사와 언론인 등 지식인들에게 벌인 탄압이었다.

만약 중국공안이 코로나19 발병을 처음으로 알리고 사망한 의사 리원량을 소환해 훈계서를 강요하는 등 겁박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는 지금쯤 일찍이 국경을 초월해 스페인내전과 중국의 국공내전에 종군했던 캐나다의 닥터 노먼 베쑨처럼 인도주의적 의사의 재림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베쑨은 홍군 부상병의 상처에 감염돼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은 뒤 지금도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추앙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 때도 아직까지 가공 인물 논란이 여전한 인민해방군 병사 레이펑(뇌봉)처럼 영웅을 만들고 선전에 등장시켜 인민의 불만을 무마하고 최근까지도 체제 유지에 활용해왔다.

신종 코로나의 초기 대응에 실패한 중국과 일본에 번갈아가며 군사와 외교문제로 시달려온 이웃 국민의 입장에서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대응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묘하게도 숙주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와 공통점이 있는 ‘기생충’의 오스카4관왕 수상은 그 자부심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인천공항에 도착해 겸손하고 의젓하게 국민에게 돌려준 박수의 감동은 딱 거기까지였다. 국내 한 기자가 우한의 방역 실패에서 중국판 세월호 사태가 연상된다며 지적한 기사가 다소 성급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신천지교회의 예배 장소 환경, 교육과 전도 방식, 교인들의 익명 선호 성향 등을 고려하면 감염병 확산의 최대 요인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여야, 진보의 이해관계를 넘어 중국발 출국자의 입국 허용과 신천지의 책임을 비교하는 논란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한중일의 코로나19사태 상황을 들여다보면 한국에서는 유독 종교단체가 매개의 한 근거지임을 알 수 있다. 특정 종교의 책임을 지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염에 노출된 종단의 수 만큼이나 종교 행사의 종류도 많았다. 심지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성지순례에마저 바이러스가 파고들었다. 그러니 교회의 이름을 바꾸고 좁은 공간에 켜켜이 모여 신흥의 교리를 공유하는데 몰두했던 신천지의 사정이야 오죽했을까.

신천지교회의 입장에서는 지자체가 나서서 교인들의 명부를 압수하고 문을 강제로 걸어잠그는 현실이 국가나 기존 교단에 의한 마녀사냥이나 종교탄압이라고 반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단 측의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듯이 상황에 대한 대처는 일반 시민들의 코로나 공포와 경제 파탄 우려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 사회적 지탄을 자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국민 대중의 관심은 신천지교회와 기존 교회 간에 촉발돼온 이단논쟁에 있지 않다. 따라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에서 이 교단이 자신들의 교리를 사회가 공감할 만큼 얼마나 합리적으로 실천하는가를 주시하고 있음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태 당시 국민들은 신흥종교의 실체에 전율한 기억이 있었지만 세월과 함께 경각심이 무뎌져 갈 즈음에 다시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 왜 유독 한국에는 종말론을 신봉하고 자신의 믿음에 동참하지 않는 가족과 재산을 버린 만큼 천국의 문에 더 가까워진다고 설교하는 종교단체가 많은 걸까. 결국 또 다시 답은 한국적인 삶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재산과 학벌, 직업과 계층 등을 놓고 벌어지는 끝 없는 경쟁은 한국인을 지칠 대로 지치고 불행을 느끼도록 내몰고 있다. 도처에서 행복이 외쳐지지만 정치를 비롯해 현실은 행복은 커녕 평화조차 언감생심일 지경이다.

한국의 코로나19사태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모순이 비춰지고 있다. 아마 그 심각성은 대구시장이 코로나보다 더 무섭다고 한 ‘정치 바이러스’보다 더 가공할 만할 것이다. 역병이 물러가더라도 한국에 기생하고 있는 온갖 다툼과 차별, 물욕과 소외가 치유되지 않으면 사회적 병리는 한국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선거와 정치의 개혁, 사회현실에 대한 합리적 진단, 올바른 사회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공통의 가치로 삼고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이번 위기를 개인위생의 에티켓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는 기회로도 삼기를 희망한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등 공용 공간에서 함부로 기침을 하고 침을 튀겨 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모자라 몸을 부딪혀도 아랑곳하지 않는 결례는 이제 개선돼야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