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몬텔레나 나파 밸리 샤도네이. <사진=나라셀라 제공>
▲ 샤또 몬텔레나 나파 밸리 샤도네이. <사진=나라셀라 제공>

1980년대 이후 미국 와인의 제 2대 중흥기를 예고한 사건은 1976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날아들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즈지가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란 이름으로 보도한 이 사건은 이후 세계 와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6년 파리에서 열렸던 한 시음회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의 기라성 같은 와인들을 제치고 1등을 모두 차지했다는 결과가 가져온 충격파가 워낙 컸던 탓에 이 시음회의 기획의도와 배경은 자주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파리 테이스팅의 기획자는 파리에서 와인샵과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였는데 프랑스 와인계에서 자신의 낮은 존재감이 고민이었던 그에게 미국의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76년은 매우 흥미로운 해였다.

고급와인의 생산역사가 빈약했던 신천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소수의 생산자들이 나름 흥미로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던 스퍼리어는 프랑스 고급 와인들과 함께 신흥 캘리포니아 와인들도 함께 시음하는 자리가 있다며 프랑스의 대표적 와인인사 9명을 심사위원으로 초빙을 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어느 누구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선전을 예상하지 않았고 기획자 스퍼리어 조차 캘리포니아 와인들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와인의 압도적 우세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화이트 부문에 있어서는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이, 레드 부문에서는 스택스립 와인셀라 카버네 소비뇽 1973이 각각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고, 이 소식은 행사에 참가했던 유일한 언론인이었던 타임즈지 기자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다.

파리의 심판을 두고 미국이 막대한 어부지리를 차지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1960년대 로버트 몬다비와 조 하이츠, 폴 드레이퍼 등의 선구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진지한 품질혁명에 힘 입어 캘리포니아 와인은 언제든 국제무대에서 대형사고를 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의 부활은 1980년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큰 호황으로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포도밭 면적은 지속적으로 늘고 하나 둘씩 대형생산자가 등장하여 와인산업의 규모적 완성도가 높아졌다. 더불어 나파 밸리의 땅값은 큰 폭으로 상승하였다. 이 명성 높은 와인산지에서 조그만 땅을 마련하여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 보겠다는 인생 후반기의 프로젝트로 와인산업에 참여한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태생적으로 작은 생산량과 최고 품질을 추구했던 이들 와이너리는 보통 부띠끄 와이너리로 불리며, 이들 중에서 대단히 빼어난 품질을 지녀 애호가들을 열광케 하는 와인들을 미디어에서 따로 컬트 와인이란 용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파리의 심판은 이렇듯 미국 와인의 품질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신흥 와인생산국들 중에 맏형인 미국의 성공은 다른 후발 국가들에게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좋은 포도밭과 양조장을 갖추고 정확하고 부지런히 일 한다면 짧은 와인역사를 지닌 나라들도 국제 무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 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증이 생기면서 이후 세계 와인계는 유럽의 지배력 약화와 다핵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음 달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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