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찾아 집중 취재 재조명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SBS 대표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선감학원'의 실체를 파헤친다

선감학원(仙甘學園)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의 섬인 선감도에 위치했던 소년 수용소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에 의해 세워져 1942년 4월에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이 수용되었고,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초기인 1982년까지 40년 동안 운영됐다.

일본은 1923년 감화령(感化令)을 발표하고 1924년 10월 1일 함경남도 영흥에 조선총독부 직속의 감화원(感化院)으로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치했다. 영흥학교의 설립 목적은 8세에서 18세의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불량 행위에는 가벼운 절도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도 포함되었으며 따라서 영흥학교는 일반 학교와 동일한 교과 수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 정책에 철저히 순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담당했다.

이후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일제에 대한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거리에는 유리걸식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해 갔다.

이에 일제는 1938년 10월에 전라도 목포의 고하도(古下島)에도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안산의 선감도에 선감학원(仙甘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가 선감학원 운영에 필요한 보조 인원 15가구 70여 명만을 남겨 놓고 선감도에 거주하던 주민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선감학원을 설치했으며, 1942년 4월에 200명의 소년을 처음 수용했다.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1946년 2월 1일 경기도로 관할 기관이 이관됐다.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되어 1970년대 말까지 존속됐다.

1942년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가는 시기로서 감화의 단계를 벗어나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42년 7월 「조선총독부 소년계 판검사회의 서류철」에 의하면 선감학원 등 감화원의 목적은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육성하여 대동아 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늘리자”는 취지로 변모되어 있었다.

황국 신민화 교육은 물론 군사 교련까지 받고 있었으며, 장차 소년병으로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보낼 계획이었다. 선감학원의 수용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났다.

자급자족이라는 미명하에 어린 소년들에게 무제한적인 노동을 강요하였으며, 육지로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결국 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선감학원은 실제적으로는 어린 소년들의 조선 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나아가 전쟁의 소모품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러한 인권의 사각 지대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사망하거나, 구타로 인하여 또 영양실조로 죽은 경우, 그리고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 등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됐다.

지금의 경기창작센터 자리가 바로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이다.

15일 밤 11시 10분 방송되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선감학원'의 실체를 파헤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실책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고발, 나아가 '선감학원' 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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