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제고등학교 낭랑18세, 민주주의 원리를 훈련하다

13일 12시 연제고등학교 강당에서 청소년자치학교 발대식을 갖고 기념촬영<사진=정하룡 기자>
▲ 13일 12시 연제고등학교 강당에서 청소년자치학교 발대식을 갖고 기념촬영<사진=정하룡 기자>

 

민주주의 시스템은 '제도'라는 한쪽 바퀴로만 굴러가는 외발 굴렁쇠와 다르다. '자율自律'이라는 자기제어장치를 장착한, 두 바퀴로 달려가는 쌍두마차를 닮았다.

제도는 법률과 기구로 구성되는데, 법률을 아무리 촘촘하고 디테일하게  고치고,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기구를 만들고 또 만들어도 민주주의는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 '사람' 즉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의 '능력'을 빼놓고는 달릴 수 없는 열차이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에는 '상대를 어떻게 보느냐'와 나의 수준에 대한 '자기규정', 그러니까 타자와의 관계와 나를 어느 수준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가 포함될 수 있겠다.

하여 상대를 타도 대상이나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건전한 경쟁자 또는 정치적 파트너로 보는 것이 '관용'이다. 우리가 흔히 '똘레랑스'라 부르는 그것이다. 또 하나의 바퀴. 자기 권한을 폭력적으로, 극단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자기제어, 자율의 바퀴. 이 두 바퀴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다수가 소수가 되고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다. 어제의 야당이 오늘의 여당이 되고 오늘의 여당은 내일의 야당이 될 수 있다. 하여 다수와 소수, 여당과 야당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사멸한다.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 상호 관용는 필수다.

자기제어로써 자제, 자율, 자치는 모두 같은 이름이겠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자율 신경계'는 우리나라 토양에서 잘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김순은 위원장이 '자치 분권 민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정하룡 기자>
▲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김순은 위원장이 '자치 분권 민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정하룡 기자>

 

우선 '자치'는 권한을 폭력적으로, 극단적으로,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사면권'의 경우,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하지만 이를 폭력적으로 행사하면 사법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또 '대법관 임명동의권'은 국회의 권한이지만 이를 극단적으로 행사하면 대통령의 임명권이 유명무실해진다.

우리가 크게 몸살을 앓은 경험이 있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는 국회 권한이지만 이를 과도하게 행사하면 국정은 마비된다. 국가기관의 권한을 헌법과 법률이 정하지만, 그 권한이 충돌하고 중첩되는 지점, 그 경계가 모호한 영역이 발생한다. 이 애매한 '틈새'에 민주주의의 '기본소양'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조절장치'가 마비되면 사망에 이르는 생명활동처럼...

현재 진행중인 대한민국 법무부와 검찰청을 보라.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권한이 중복 중첩돼 충돌하고 있는 지점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애초 검찰청은 법무부 소속이고, 검찰 업무는 법무부 업무다. 그러나 '수사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외청으로 검찰청이 설립됐던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 법무부와 검찰의 업무와 권한은 당연히 충돌하게 되어 있다. 이 '틈새'에서 어느 한쪽이 자기 권한을 폭력적으로(여기서의 폭력은 '불통不通'을 부르는 일방통행을 의미), 또는 과도하게 행사하면 국가의 법무, 검찰시스템은 그 작동을 멈추게 된다. 하여 검찰의 수사 중립성과 법무행정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평소 몸에 밴 '자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돼야 하는 것이다.

이지민 학생이 내건 '자치 선언문'이다 <사진=정하룡 기자>
▲ 이지민 학생이 내건 '자치 선언문'이다 <사진=정하룡 기자>

 

우리의 자랑, 2002월드컵. K-팝 BTS. 촛불시민혁명. K-방역... 많고 많지만 근래 확실한 우리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자랑거리는 단연 영화 '기생충'일 것이다. 세계시민이 기생충에 보내온 뜨거운 찬사에는 세계의 '양극화'에 대한 공감이다.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은 양극화가 만든 지옥같은 틈새, 그 비극과 고립의 지점에서 끊임없이 보내오는 SOS 메시지는 '사람살려...'다.

여하튼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트럼프 대통령 이후의 미국 사회를 살핀 결과를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상호관용과 자치의 규범이 무너지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좀 비약된 듯하지만, COVID-19 PANDEMIC을 비롯 지구 각처에서 SOS 메시지가 탐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물며 민주주의임에랴...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렇지 않은가...?

여하튼 두 바퀴의 한 축에서 상대는 경쟁자를 넘어 강도요, 적이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내 욕망의 무한성취를 위해 전력질주해야 하는 시스템.

다른 한 축은 상대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포용, 관용... 그리고 나의 욕망을 제어하고 자제 가능한 시스템, 자치自治.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두 극단의 지점이 너무 멀거나,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 지...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천만다행인 것은 2020년 4월 총선에 처음 등장한 53만2천 여명의 '낭랑娘郞 18세'일 것이다. 

관용과 포용을 위태롭게 하는 '좀비 세대'는 '상대가 먼저 시작했다'며 무지와 몽매로 목의 핏대가 새파랗다. '낭랑 18세'는 상대의 불관용과 권한 남용에 대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불관용과 극단적, 폭력적 권한 행사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줄 안다.

'영롱한 거짓과 아름다운 속임수'에 능한 '트와일라잇 세대'(혹은 '빨대')는 자율과 자치의 원리 앞에서 입술이 새빨갛도록 웃는다. '낭랑 18세'는 그들의 '환각과 중독'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망상의 본질을 '브레이크 드루'할 뿐이다. 씩씩하고 재미나게, 충분히 가볍게 돌파할 줄 안다.

'낭랑 18세'가 활동하는 현장을 다녀왔다. '자치와 분권, 민주주의'라는 탁월한 덕목과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자들이 머지 않은 장래에 여기에서 쏟아져나올 듯싶다.

2020년 8월13일, 14일은 1945년 8월15일만큼이나 뜻 깊은 날이 될 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제고등학교 역시 역사적 장소가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이성문 연제구 구청장과 함께 퍼포먼스 후 기념촬영 <사진=정하룡 기자>
▲ 이성문 연제구 구청장과 함께 퍼포먼스 후 기념촬영 <사진=정하룡 기자>

 

8월 13일 아침 9시부터 교실 곳곳에서 모둠별로 '청소년자치학교'가 열리고 있었다. 낭랑 18세들이 자치와 분권, 주민자치에 대한 기본기를 익히고 있었던 것.

민주주의? 분권? 자치? 주민자치...? 모둠별로 토론하고 협의하고 합의해서 이날 12시에는 낭랑 18세들의 '대단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친구들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청소년 참정권에 대하여 적극 홍보하겠습니다"
"청소년은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여기 선언문 발표 현장이 '대단하다'는 표현은 한마디로 '파격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여느 행사처럼 꼰대들의 '엄숙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발대식 행사에 참석한 이성문 연제구청장은 '낭랑 18세'들이 씌워준 풍선을 덮어쓰고 북을 치며 강단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치러야했다.

이성문 연제구청장은 "청소년을 지역사회와 함께 키우고 지역을 위해 일하는 리더로 양성하는 것이 진정한 주민자치 실현을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자치학교를 통해 청소년이 마을에 관심을 갖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먼 길을 달려온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김순은 위원장 또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행사 인사말을 하려다말고 낙랑 18세들이 진행하는 '카드섹션'을 지휘해야만 했던 것.

이들이 이끄는대로 카드섹션 후 김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라떼는)우리는 '민주' '민주주의'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던 세대를 살았다"며 당대의 엄혹한 시대상을 밝혔다.

이어 "지금은 '민주' '자치' '분권'이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평범화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는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오늘의 '자치학교'가 한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의 장, 몸에 익히고 훈련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제고등학교 최종원 교장과 관계자들은 행사를 마친 후 사석에서 "우리 세대는 교복을 입었고, 머리를 똑같이 깎았으며 교련이라는 군사훈련도 받았다, 여학생이라 예외는 없었다" "1주일에 한번은 운동장 땡볕에 모여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든지 학생들은 매번 넘어졌다" "21세기의 아이들을 20세기의 교실에서 19세기의 선생이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 분권, 자치란 것도 그렇지 않겠는가... 가르치는 선생님세대가 자치, 민주, 분권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이번 4월 총선에 18세가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정치하시는 분들은 고딩이 유권자임을 잘 모르는 듯하다" 등의 담소를 나눴다.

이번 자치학교 행사 내내 친구들과 함께한 연제고등학교 장현우 학생회장은 "각 모둠별 조장들도 내빈으로 참석하신 공공기관 어르신들이 학생들과 함께 직접 참여하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다고 하더라"며
민주주의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막연한 질문에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이번 4월 총선에 어떤 후보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느냐는 질문에도 "후보들의 정책 등 홍보물을
꼼꼼히 살폈고, 또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고 말해 '낙랑 18세'의 선택 기준이 후보자들의 '정책'에 있음을 알렸다.

또한 "처음으로 겪은 이번 자치학교 경험은 참 신선했고 재미있었다"며 소감을 밝힌 뒤, 만약 본인이 국회의원으로 나선다면 어떤 정치인이 되겠느냐는 질문에는 장현우 학생회장은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정치인을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만약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이웃 아저씨처럼 항상 주민들 곁에 있는, 친근한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덧붙여 "정치뉴스를 보면 너무 심각하고 딱딱하다. 정치가 재미있으면 좋겠다. 새로운 변화를 보고 싶다. 새로운 변화란 당선됐을 때 처음 공약이 끝까지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부산 연제고등학교 장현우 학생회장이 교련복을 입고 맨 앞줄에서 포즈를 취하고, 그 뒤로 최종원 교장선생님도 보인다. <사진=정하룡 기자>
▲ 부산 연제고등학교 장현우 학생회장이 교련복을 입고 맨 앞줄에서 포즈를 취하고, 그 뒤로 최종원 교장선생님도 보인다. <사진=정하룡 기자>

 

이번 자치교실을 이끈 상상책마을 윤수진 대표는 "이번 '찾아가는 청소년자치학교'가 연제고에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 타 학교에서도 민주주의의 기본소양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청소년의 역할 인식과 주민자치에 대한 관심 제고를 목적으로 마련된 이번 '찾아가는 청소년자치학교'는 13일 발대식을 시작으로 14일까지 관내 연제고등학교에서 학생 40명을 대상으로 운영됐다. 자치분권 및 주민자치에 대한 기본교육, 우리 마을 살펴보기, 청소년 마을계획단, 모의 주민총회 등의 '자치'교육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한편 연제구는 주민자치회 활성화 및 주민참여 제고를 위해 주민자치회 전환 시범사업 추진, 동별 마을계획단 운영, 주민자치학교 운영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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