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먼저 의장님께서는 경기고-서울대를 나오셨는데 당시 학번이 어떻게 되십니까?


65학번입니다.

2. 65학번 당시에 민주화학생운동부터 시작해서 쭉 하셨는데 참여하게 된 계기를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65년도 대학교 입학했는데 그 전인 64년도부터 65년도까지 걸쳐서 대일본 저자세 굴욕외교 반대시위와 집회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식인들까지 광범하게 전개됐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대학교 들어와서 글로 읽어보고 선배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본이 협상에 나와서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고 탄압한 것에 대해서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잘한 거다, 한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도움을 오히려 줬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분개했습니다.

두 번째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싸우고 투쟁했던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판자촌에서 사신다는 언론보도가 60년대에는 심심치 않게 나왔어요.

그에 비해서 민족을 배신하고 굴욕했던 친일파 자손들, 친일파 당사자들은 한국에 지도층을 형성해서 떵떵거리고 잘 산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거는 있을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정서가 움직이고 이게 사실이라면 이건 고쳐져야 한다 그러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을 했죠. 그게 출발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제가 알기로 졸업하시고 회사에 취직도 하시고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쭉 학생운동을 했어요. 67년도에는 서울상과대학 회장을 하다가 67년도에 대선과 총선이 있었습니다. 이 선거가 부정선거였습니다. 항의집회 하다가 제적당해서 군대에 강제 징집 당했고 70년도에 복학해서 71년도에 대선이 있었고 총선이 동시에 있었어요.

그때 심재권,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이런 친구, 후배들과 더불어서 전국에 참관인을 학생들을 중심으로 내려 보내는 운동을 뒷받침하고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참관인들이 전국에서, 특히 농촌지역에서 몰매를 맞고 쫓겨나서 참관을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0만표 정도로 이겼는데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 이런 소리를 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이라고 그러죠.

거기서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것이 그 후에 역사에서 드러났습니다.

71년도 학생운동이었던 전국 참관인 배치운동을 벌인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를 탄압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른바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3. 참관인을 조직하고 참여시킨 게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의 내용이었습니까?

그렇죠. 그 자체를 기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고 그래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라는 걸 만들었죠. 그래서 거기에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은 투옥돼서 옥살이를 했고 저는 지명수배를 받아서 피신했어요.

그래서 이때부터는 김근태는 공소의 김근태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71년도 지명수배를 받았다가 73년도 10월쯤 유신 이후 1년 지나서 집에 돌아왔고 정보수사기관에 자수하기 싫어서 자수 안 했어요. 그건 자존심상 용납이 안 됐습니다.

자수는 하지 않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당시 철강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래서 한 10개월 다니다가 지금 기무사 본부였다가 현대미술관으로 이양된 삼청동 가는 길에 있는 건물에 끌려가서 하루종일 타작을 당하고 나온 다음에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75년도에 김상진이라는 서울대생이 긴급조치구호 직전에 유신체제에 항의하면서 자결했어요. 그걸 계기로 해서 서울대에서는 장만철 감독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한국 데모 사상 처음 사물놀이를 앞세우고 집회와 시위를 했고요, 긴급조치구호 아래에서 그랬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추진했는데 이 두 사건에 관심은 있었지만 내가 직접적인 지휘를 하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명수배를 받아서 79년 10.26이 일어날 때까지 4년여를 피신합니다. 70년대는 그래서 김근태는 공소의 김근태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 워 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울의 봄’ 때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서울의 봄’ 때 당시 학생 지도부가 스스로 결정하고 지휘하겠다고 했고 학생운동의 선배인 우리들은 고가도로 위에 올라가서 지켜보고 했는데 회군하는 걸 보면서 참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이른바 ‘서울역회군’이라는 걸 보면서 있을 수 없는 결정을 한다, 그런데 그걸 막을 수 있는 통로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때 주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서울역회군’은 명백히 오류였다고 보십니까?)

그렇죠. ‘서울역회군’에 우리가 전해들은 얘기는 전두환 군대가 출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대학캠퍼스가 거점이니까 캠퍼스로 돌아가서 거점을 지키자, 만약 이게 사실이었다고 한다면 잘못된 거죠.

그때는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서울의 봄’으로 명명될 정도로 강력한 요구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국민의 요구를 거스르는 패배적인 결정이었죠.

(국민의 요구가 분명히 광범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슬렀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이 있었지 않습니까? 실세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거였는데 그 출발은 부마항쟁이었거든요, 그것이 서울과 전국으로 확대됐는데 그걸 외면한 패배적 사고였죠.

5. 그러고 나서 광주항쟁 이후, 83년 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10.26 이후에 말하자면 한 시민으로서 참여하고 활동가로서는 적극적인 활동을 못 했어요. 피신하다 나오니까 근거가 별로 없고 연계가 없었고 지식인운동이나 이런 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10.26 이후에 나와서 인천도시산업선거에서 조화순 목사님, 김동환 목사님을 모시고 노동자교육상담을 83년 민청련 의장이 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인권교회에 있었군요.)

인권교회는 아니고 도시산업선교회 소속이었어요. 인권교회는 거기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였고 도시산업선거회는 따로 있었어요, 그 건물에 같이 있기는 했지만.

6. 83년도에 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으시면서 아마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민청련은 상당히 비합법 공개단체로서 최초의 위상을 가졌지 않나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민청련이 가진 의미 부분에 대해서...

비합공개단체라는 건 생소한 용어고 공개조직이었죠. 당시 80년 초반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캠퍼스 내, 학교 내에서 시위하고 집회하고 감옥살이하거나 제적당해서 군대 가거나 바깥사회로 축출당하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 청년들이 부글부글해서 일부는 사회과학 출판사로 가서 활동했는데 그러고도 차고 넘쳤죠.

광주항쟁 이후 슬픔과 분노는 조금 잦아들기는 했지만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가슴속에서는 내연하고 있었고요. 전두환 정권이 이제 다 장악했으니까 자기들이 좀 풀어줘도 된다는 유화국면을 조성했어요.

그때 이걸 뚫고 가야 된다는 의견들이 당시 청년들의 일부에서 만들어지고 저도 이건 돌파해야 된다, 민주주의 요구는 국민들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다는 판단을 해서 공개적인 조직을 공개적으로 출범시킨 거죠.

사람들이 모여서 민청련이 만들어졌고 민청련이 만들어진 1년 후에 민추협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청련이 만들어진 이후에 민통련도 만들어지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도 만들어지고 하면서 각 영역에, 각 지역에 공개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감히 말씀드리면 그것이 87년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인 두꺼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하든데 무엇이었나요)

두꺼비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두꺼비가 뱀한테 잡아먹히면 자기는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서 뱀도 죽는데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해서 새롭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탄압을 받아서 죽겠지만 이것이 한국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는 데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희생을 결단하자는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고요. 당시 민중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는데 민중은 그렇게 세련되고 예쁜 게 아니다, 두꺼비같이 못생겼지만 우직하게 가는 방향을 가는 게 두꺼비다, 우리가 민중을 담자는 취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질경이를 만드는 이기연 씨가 그 주장을 강하게 했고 우리도 동의해서 마음을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386정치인이라고 일컫는 분들이 이때 민청련에서 상당히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는데 기억나시는 분들이 있다면...)

386들은 없었어요. 제일 막내가 유시민, 최민, 문용식 정도의 사람들이었고 학생운동하고는 연결하지 않습니다.

학생운동하고 연결하면 불필요하게 정보수사진의 공격과 탄압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건 하지 말자고 해서 안 했습니다.

7.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셨는데, 나중에 고문기술자 이근안과의 화해를 한 것에 대해서도 유명합니다.

그건 내가 사실은 잘 말하기 싫어하는 건데 고문 자체가 끔찍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문을 받은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고 군사독재 때 많은 사람들이 고문 받고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에 비해 김근태는 보상을 받았는데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이 있어서 그걸 자세히 얘기하는 게 부담감이 있습니다. 이근안 전 경감하고 화해했다는 얘기는 사실 이렇습니다.

용서를 했죠. 용서를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고 전 도봉구청장을 하던 한 분이 잘못돼서 구속이 됐어요.

여주교도소에 있는데 면회를 한 번도 못 갔어요. 제 지역구가 도봉구 아닙니까? 그래서 그분을 면회하겠다고 했는데 그 전에 이근안 전 경관이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걸 공개적으로 얘기한 게 언론을 통해서 저한테 전해왔습니다.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 이후에 보좌관들이 거기에 이근안 전 경감이 있다는 걸 알고 저한테 얘기해서 제가 망설였어요.

전 도봉구청장은 면회하고 이근안 전 경감을 면회 안 하고 오는 방법은 없는 가 검토했는데 그러면 참 속 좁은 사람이 될 것 같고 만나자니 부담스럽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철회를 못하고 갔다가 이근안 전 경감 면회를 요청하니까 본인이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만났어요.

방에 들어오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고 그래서 제가 고맙다고 하면서 손을 잡고 의자에 앉도록 권했습니다.

물론 제 머릿속에 양심의 가책과 뉘우침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닌 혹시 가석방과 같은 모종의 이해관계가 작동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건 내 영역이 아니라 생각했어요.

그건 신의 영역이고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니고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그것에서 내가 용서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또 이근안 전 경감을 위해서 해야 되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받아들였는데 그 뒤에도 많이 뒤척거리고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용서한다고 제가 분명히 그랬고 용서한 거죠. 마음은 그 외에도 때때로 불편한 적이 있었습니다.

8. 대선이야기로 돌아와서 87년 대선 때 왜 비판적 지지를 선택하였나요.

불가피했던 거고요. 내가 감옥에 85년도 7월인가 8월에 들어갔는데 민청련 두 임기를 의장으로서 다 마친 다음에 그 직후에 잡혀 들어갔는데 그때 들어가기 전에 이런 논쟁이 있었어요.

국민과 함께하는 슬로건을 뭐로 할 거냐, 나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라고 제안했습니다. 이게 나중에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조금 바뀌기도 했고요. 그때 일부의 청년들이 제헌의회를 주장했어요.

제헌의회를 나는 반대했습니다. 취지가 보다 발전된 민주주의를 반영하는 제도로 기구들을 만들자는 취지로 이해했지만 한국에서 헌법을 제정하는 제헌의회를 열자는 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고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측면이 있었어요. 독자후보로는 당시에 정치운동이지만 선거를 통한 정치운동을 해본 적이 우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의식에 과잉된 것이고 희망적인 것을 정치마당에서 제기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죠. 민주화운동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의사를 결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제일 중요한 게 국본(국민운동본부)이었지만 국본은 말하자면 임시전투대형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핵심은 민통련, 민청련, 민가협,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전투력이 굉장히 컸고 돌파력이 있었지만 정치력에 있어서는 이 세 단체에 버금가지 못했고요. 그러나 학생들도 나름대로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서 결정했다고 감옥 안에서 들었습니다.

87년 대선은 누구도 외면할 수가 없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민주적이고 체계적으로 결정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제약 받는 조건 아래에서의 선택이 뭐냐, DJ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DJ를 후보로 하되 후보로 그냥 미는 게 아니라 우리는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밀어서 DJ를 후보로 만들자, 이런 제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유일무이하게 옳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때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또 바깥에서 조직적으로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제 집사람이 면회 와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선택에 따라서 분리됐던 사람들 사이에 미운 마음이 너무 강력하다, 그 미워하는 마음이 증오심, 적개심 수준까지 가는 것 같다. 그걸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 그 역할을 김근태가 해야 된다"고 자기는 생각한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87년 대선에서 어떤 선택이 옳았느냐에 대해서 한 번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주장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세월이 20년 이상 지나갔기 때문에 나름대로 속생각을 얘기했습니다.

9. 당시 대선 전략으로 후보단일화와 4자 필승론이 있었는데

후보단일화는 지상 명령이었고요. 우리 민주화운동세력이 할 수 있는 선택이 뭐였냐 하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 결정했어야 되느냐. 후보단일화는 스펙트럼이 여러 가지 있지만 YS로의 후보단일화도 사실상 있었고 DJ로의 후보단일화도 있었고 그런데 우리가 막연히 후보단일화 주장하는 게 옳았느냐, 이것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는데 오늘은 그게 주요 논제는 아니니까 묻지 말고 넘어갑시다.

‘4자 필승론’은 잘못된 것이었고요. 그건 코멘트할 가치가 없죠.

10. 당시의 노태우 측에서 6.29 발표를 하기 전에 이미 직선제에 대해서 준비했던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도 많더라고요. 그런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나는 못 들어봤고요. 준비했다기보다는 그때는 상층 기득권세력이 공포에 떨었죠.

그래서 그 세력이 똘똘 뭉쳐서 기술은 있는 사람들이고 미국의 선거홍보회사들하고 쉽게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초빙해서 한국의 정치지형과 분위기를 진단한 다음에 효과적인 전술과 선거운동 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보통사람들’이 굉장히 먹혔지 않습니까?

11.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분열됐던 제안을 88년 이후에 다시 힘을 결집해 전민련을 발족시켰습니다. 나중에 전국연합 등 민족운동의 전선체로 쭉 이어져오다가 주요인물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나서 전선조직이 그 역할을 못하게 된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전민련은 대단했죠?

그렇죠. 전민련 만드는 데 이부영, 장기표, 김근태 세 사람이 대선에 왜 패배했는지 논쟁을 유보하고 타협한 거였죠. 제 나름대로는 비판적 지지에 대해서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치는 책임져야 되는 거니깐요.

그래서 국민들 속에서 양김은 분열됐지만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단합하는 것에 대한 높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 기대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데 그러나 그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치적 선택행위라는 건 많은 경우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국인식과 철학이 배경에 있는 경우가 많죠.

전민련이 첫 번째 어려워졌던 것은 문익환 선생님이 전민련 고문이었고 민통련 의장이셨는데 89년 가을에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계기로 기득권을 가진 특권적 언론이 공격을 하고 사정기관이 탄압을 해서 전민련이 어렵게 됐어요.

당시 민주화 이후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대의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기 때문에 버텨냈지만 곧 이어서 현실정치, 제도정치에 어떻게 참여할 건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쟁이 발생했는데 그걸 계기로 해서 전민련 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분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서 양김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실망도 컸었는데, 역시 또 분열하는구나, 통합되고 단합했다가 또 분열하는구나 하는 국민의 실망감이 크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2. 95년도에 정계진출 과정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할 건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아주 격렬하게 있었어요. 독자정당을 만들자, 그래서 민중당, 민중의 당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분이 있었고. 당시 민자당이 만들어졌는데 민자당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모아서 민주연합정당을 만들자고 주장했는데 이게 타협이 안 됐어요.

전민련에서 표결을 했는데 독자적인 민중을 대표하는 정치정당을 만들자는 게 부결됐고 그분들이 나갔죠. 그래서 전민련을 정비한 다음에 저는 민자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자는 깃발을 들고 ‘통일시대국민회의’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더불어서 당시 DJ 세력, YS가 민자당으로 합당하고 남은 작은 민주당세력 그리고 재야세력, 이렇게 3자 세력이 통합을 준비하다가 저는 다시 체포돼서 90년도에 감옥에 갑니다.

김능구 사장도 그때 만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때 신민주연합, 신민당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저는 빠지고 밖에 있었던 신계륜, 이우정 선생, 박우섭이 참여해서 신민당을 만들었다가 92년도 대선에 패배하고 나서 반민자연합당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95년도 6월 통일시대국민회의 일부 회원과 더불어서 민주당에 입당하고 참여하게 됩니다.

그때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세력에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고 문익환 목사님은 그 전에 돌아가신 걸로 기억하는데 종교계 인사들은 간디의 길로 가고 우리는 네루의 길로 가서 정권교체를 이뤄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다짐을 하면서 참여하게 됩니다.

13. 95년도에 입문하고 나서 지방선거 끝난 다음에 분당을 겪고 DJ는 정계복귀와 국민회의를 창당하게 됩니다. 그때 의장님께서는 마지막에 국민회의로 입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고민을 오래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요, 김 사장이 얘기하신 대로 그렇습니다. 95년 2월에 입당했다가 5월에 지자제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과 경기 후보가 DJ가 밀던 후보가 있는 데 이기택 대표가 반대하는 등 갈등이 심했습니다.

지방선거 끝나고 DJ가 정계복귀를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이런 얘기가 공공연하게 흘러 다녔어요. 납득이 안 됐어요. 그래서 이기택 대표가 당론을 거부하고...

내 상식으로는 참 납득이 안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지사는 졌지만 수도권 지자제에서 압승을 했어요.

그 직후에 김 사장 말씀한 대로 DJ가 정치복귀 선언을 하죠. 정치복귀 선언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지적하고 비판받아야 된다, DJ가 감수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정권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분열하면 안 된다, 분열하면 정권교체 또 못한다’고 반대했어요.

동교동이나 DJ 쪽에서는 이기택 대표가 지자제 선거에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반대해서 중요한 경기지사를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통제할 수 없다 등 이걸 가지고 아주 격한 논쟁이 발생하고 저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동력이 빠지는 걸 보면서 나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민주세력의 역량은 계승돼야 되는 거니까 나는 "눈물을 머금고 간다, 그때 남았던 노무현, 유인태, 이부영, 이런 분들한테 그건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민주세력의 연대를 계승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가 사면복권이 안 됐어요.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을 아마 못 하게 될 거다, 그걸 각오하면서 민주세력 계승을 위해서 간다, 이렇게 얘기하고 국민회의로 이동을 했어요.

(그때까지도 사면복권이 안 됐네요.)

안 됐어요. 그 전에 갔다 오는 건 사면복권이 됐는데 집회시위를 한 것은 사면복권이 안 됐어요.

(사면복권이 되시고 15대 총선을...)

사면복권이 된 건 YS가 UN본부를 1995년 10월달에 방문했는데 그때 작고한 에드워드 케네디가 YS 대통령을 만나서 김근태 씨를 사면복권 해달라 요청했고 YS가 흔쾌히 OK해서 사면복권 돼서 95년 총선에 출마할 수 있게 됐어요. 우연이었죠.

(애드워드 캐네디가 없었으면 사면복권도 어려웠겠네요. )

애드워드 케네디가 YS한테 면담신청을 했을 때 UN대사였던 분이나 미국대사였던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메사추세츠 주가 애드워드 캐네디의 지역구인데 거기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패트리어트미사일 구입 요청을 할 것이다 해서 자료 준비했는데 그런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김근태 씨를 사면복권 시켜달라고 했고 YS는 OK하고... 나는 YS한테 신세진 사람이 됐습니다.

14. 96년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나서 97년이 대선인데 96년도 말에 전당대회가 있었죠. 국민회의에서는 DJ는 반대세력이 많기 때문에 제3후보를 넣어보면 다 당선으로 나왔었죠.

그것보다는 국민경선추진위원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때 핵심은 조순 시장을 참여시켜서 DJ하고 조순시장을 국민경선제로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어서 DJ가 되면 DJ를 후보로 내세우고 조순 후보가 되면 조순 후보를 내세우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지나간 얘기니까... DJ는 “그 방향으로 가자, 그런데 다음번부터 가자” 그리고 조순 시장은 “그거 하면 안 된다, 당신이 내 캠프로 와 달라” 그런 얘기를 해서 사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염원이 담긴 정권교체이기 때문에 국민경선추진위원회에 참여해서 후보가 되면 누구든지 승리할 수 있고 정당성 있는 거 아니냐 하면서 호소했습니다.

그때 정대철 의원이 후보로 나서겠다고 하면서 국민후보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국민경선제를 제안한 사람으로서 그걸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로는 이상적인 제안을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대선은 국민경선 때문에 승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때 DJ하고 조순 시장이 OK를 했으면 정권교체는 훨씬 더 협력할 만한 세력 사이에 협력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5. 그 이후 97년도에 대통령선거가 벌어집니다. 당시에 의장님께서는 정말 본인의 선거보다도 더 열심히 선거운동을 뛴 게 눈에 선한데 당시 어려운 가운데 선거캠페인을 진행해 나갔다고 봅니다. 39만표 차이, 1.6% 승리였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JP하고 손잡고 지역등권론을 앞세워서 정권교체를 위해서 감내하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 슬펐어요.

그리고 92년도 당시 전국연합, 정책연합을 YS하고 해서 많은 차이로 졌죠.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역할이 대폭적으로 축소되고 감소된 것 뼈아프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97년 선거에서 국민경선제가 받아들여졌으면 이런 제약이나 수모를 겪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92년도에 YS가 민자당으로 가지 않고 DJ와 다시 경선을 해서 그때 누가 될 수는 없었는가, 이런 것에 대한 아쉬움, 슬픔이 있었어요.

정권교체는 됐지만 이것이 이후에 국민의 정부나 새천년민주당이 행보하고 개혁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정치를 하는 데 많은 제약이 됐습니다.

뜻을 펴는 데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고 지나간 바른 선택을 해야 될 때 선택하지 못하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반드시 부담으로 전환하는 것을 생생히 봤어요.

16. 그런 제약과 수모까지도 감내하면서 대선캠페인은 정말 온힘을 다해서 열심히 하셨죠. 그 승리의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첫 번째는 이회창 후보에 비해서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니냐. 그리고 YS도 대통령했는데 DJ도 한번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게 제일 큰 힘이었던 것 같고요.

거기에 지역등권론이라는 게 현실정치에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인제 후보가 출마를 한 게 당시 여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표가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도움이 됐고요. 하늘이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17. 혹자는 YS로 단일화 됐어도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더라고요.

역사는 가정으로 보기에는 어려운데 당시 대중적 분위기로서는 YS로 후보단일화 되거나 DJ로 후보단일화 하면 압도적으로 되는 거였죠. 민주개혁세력이 어렵다는 말에 저는 생각이 같지 않습니다.

18. 민주세력이 어렵다고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앞으로 대선도 그걸 염두에 두고 전략을 세워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얘기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은 게 민청련 만들 때 대부분이 반대했어요. 민청련 결사한 건 타이밍도 그렇고 옳았습니다. 민주개혁세력이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지난 대선과 총선은 질 수밖에 없는 구도였거든요.

이번 작년, 재작년. 그런데 촛불집회와 서거정국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능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겁게 타고 있는지를 보지 않았습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봤습니다. 국민의 힘을.

19. 16대 대선에서 민주당 국민경선이야말로 당시 비리게이트로서 얼룩진 국민의 정부의 정국이 새로운 제도적인 계기가 됐는데요. 의장님께서 국민경선의 최초 제안자라고 들었습니다.

하나의 제도는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있어요. 어떤 제도를 도입하면 그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게 반드시 있죠. 그런데 당시의 국민경선제는 새로운 것이었고요.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갖는 불신과 혐오감의 일부를 극복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서 새로운 것이었고 신선한 것이었죠. 국민의 공감대를 널리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토요일마다 토요드라마 이런 식으로 해서 드라마나 영화가 안 된다 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는데 의장님께서는 이때 결국 중도 사퇴하셨죠? )

그렇습니다.

20. 그때 국민경선에 실제 참여하신 입장에서는 어땠습니까?

국민경선제가 성공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걸 통해서 정권재창출이 이루어졌을 때 은근히 가슴속에 자부심과 기쁨을 가졌죠.

그러나 중간에 노무현 후보와 이미지나 노선이 비슷하다고 그래서 후보단일화를 통해서 이인제 후보를 제압해야 된다는 압력과 요구가 강했습니다.

또 노무현 후보가 호소력 있게 이인제 후보와 대립각을 잘 세웠고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걸 보면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꼭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이게 내가 취해야 될 선택이고 도리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노무현 후보가 된 걸 보면서 하늘은 무심치 않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21. 당시에 보면 의장님께서 노무현 후보 측에서 무리하게 단일화를 요구한다는 기사도 종종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건 지나간 이야기인데 웃으면서 합시다. 프레스센터 뒤에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기자가 쫓아왔어요. 만나는 건 우리 보좌관하고 노무현 후보 보좌관밖에 몰랐는데 찾아왔어요.

우리 보좌관은 제보를 한 적이 없고 그런데 기자는 알고 왔고 노무현 후보 쪽에서는 후보단일화가 도약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확고한 판단이 있었고 지지율이 앞서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치는 그럴 수 있다 싶지만 노무현 후보하고 김근태 사이에는 그런 폴리틱스는 좀 안 맞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했죠. 그런 비슷한 게 몇 번 있었어요.

22. 열린우리당은 정당사에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다고들 합니다. 의장님은 실패했다고 하는 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 후에 유일무이하게 마지막으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때 독배는 마시는 심정이다 해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조심스러운데 지나간 얘기니까 기록을 위해서 한번 얘기합시다. 실패했다는 얘기보다는 제 입장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고요.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첫 번째 원인은 우리들의 부족함과 오류 때문에 그랬고 두 번째는 국민들, 유권자, 대중의 기대수준이 급격하게 높아진 걸 우리는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책, 대응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새로운 정치가 우리 구호였는데 새로운 정치 내용의 구체적으로 콘텐츠가 뭔지에 대해서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4대악법 개정과 폐지 정도였는데 그 중의 핵심인 국가보안법 문제도 제대로 해결을 못 했고요.

IMF 위기 이래 IMF와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금융을 중심으로 완전개방,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강요하고 강제했는데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고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게 다 합쳐져서 진보개혁세력이 기대하는 만큼 대안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국민의 평가에 직면하게 됐고 그걸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2006년도 2월에 전당대회가 있었어요.

전당대회에서 정동영과 김근태가 격돌을 했는데 제가 졌습니다. 제 역량이 부족한 탓이 제일 크게 작용하지만 그때 주장했던 게 저는 대연합을 통해서 이 상황을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제가 거론했던 사람들이 고건, 강금실, 이수호, 박원순... 이 사람들에게 대연합을 구성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동영 후보는 우리가 잘할 수 있다, 그래서 자강론이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이미 우리 스스로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정치 환경과 분위기가 왔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패했죠.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참패를 했습니다.

수도권에서 당선된 데가 거의 손꼽을 만 했습니다. 이때로 가면 다음 대선과 총선도 이렇게 참패한다는 게 예고된 것이었죠. 그것을 수습을 못 했던 겁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건 종합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겁니다.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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