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역정 40년,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진솔한 정치이야기를 듣는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여섯번째 인터뷰 인물은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이다.

한화갑 대표 그의 정치역정은 고스란히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해왔다. 한 대표는 DJ가 걸어 온 가시밭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왔다. 한 대표의 정치사는 DJ의 정치사와 동일하다.

박정희 정권의 융단폭격식 낙선전략을 뚫고 승리했던 1967년 목포 국회의원 선거 현장에 한 대표는 DJ와 함께 있었다.

그 곳에서 한 대표의 파란만장한 운명이 시작했다.

1971년 DJ가 YS를 누르고 신민당 대선후보가 되는 과정,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DJ와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전의 뒷이야기, YS 선거지원의 진실 등이 한 대표의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진다.

1987년 대선당시 4자 필승론의 전략을 내세운 주인공이 바로 한 대표였다는 것도 이번 인터뷰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

2002년 드라마 같았던 민주당 대선경선. 최고 하이라이트는 광주경선이었다. 광주경선을 둘러싸고 복잡했던 당시 상황을 한 대표에게 솔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한 대표는 노무현 정치를 신화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인터뷰속에 있다.

한 대표에게 지금은 시련의 시절이다. 그러나 한 대표는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힘차게 일어섰다. 40년 정치역정을 통해서 터득한 정치의 요체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이제 한 대표의 인터뷰속으로 들어가 보자.


1부 DJ와 운명적 만남, 그리고 시련의 세월들

1967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만나게 되어

김능구(폴리피플 대표, 이하 ‘김’) : 정치를 입문하게 된 계기가 맨 처음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과정을 돕는 과정에서 함께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한화갑 대표(이하 ‘한’) : 1967년 6월 국회의원 총선거 때입니다. 그때 제가 목포에서 김대중 후보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한 겁니다. 그걸 계기로 해서 제가 김대중 대통령 주변사람이 된 겁니다.

김 :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한 : 그때 제가 놀고 있었어요. 왜 놀았냐면 취직이 안돼요. 그 때 당시 제가 대학 졸업하기 직전에 5.16이 나버려서,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은 취직이 안돼요.

제가 그때 신체검사를 바로 못해서 신체검사 기피자가 된 거에요. 외무고등고시를 보려고 했는데 신검기피자는 시험도 치룰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인천에서 지금 새얼문화재단을 하고 계신 지용택씨랑 같이 새물결이란 잡지를 만들려고 군사정부에 등록신청을 한 적이 있는데, 지용택씨가 진보당 조봉암씨와 관련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나까지 요시찰인이 돼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깐 취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선거에 출마했다고 도우라 해서 제가 놀고 있으니까 가서 도운 겁니다.

박정희 정권의 집중공격, 1967년 6월 목포선거는 전쟁터 같아

김 : 그때 DJ가 당선되었던 선거죠?

한 : 목포에서 1954년에 한번 떨어지고 1963년 두 번째 도전에서 되셨지요. 1967년 선거가 유명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 직접 내려 와 2번 유세를 하고 국무회의를 2번 했어요.

dj와 한화갑
박정희 대통령이 다른 사람 열 명, 스무 명이 되도 괜찮은데 김대중이는 꼭 떨어드려야겠다고 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 당시 목포의 선거운동은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편집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1. 05. 13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하여 당선되어 4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이후 1963년에 목포에서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목포 선거는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김대중 낙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당선됨으로 유명해진 선거임)


1971년 신민당 대선경선, DJ의 경남조직책 맡아 승리 이끌어

김 : 한국정치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지역주의입니다. 영남은 한나라당, 호남은 민주당 이러한 구도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한 :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을 때만 하더라도 전라남도에 야당 국회의원 수보다 여당(공화당) 국회의원이 훨씬 많았어요.

그리고 영남에도 대구나 부산에 야당국회의원이 많았어요. 유명한 조재천씨가 대구서 당선되고 현석호씨, 부산의 김응규씨, 김영삼 대통령도 물론 부산에서 당선되고 그래서 여야간에 어느 지역이나 국회의원이 있었지만 오히려 전라도에서도 여당 국회의원 수가 많았었어요.

김 : 그 이후 71년에 DJ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셨는데 특이한 것이 경남 지역의 신민당 대의원 조직사업을 한 대표가 맡아서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 네 그 때 71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김대중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희들이 각 도를 맡아서 대통령 후보 만드는 조직을 1968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선거운동 하던 사람이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었어요. 도를 나누다 보니깐 나한테 배정된 것이 경상남도를 맡아라 이렇게 된 겁니다.

당시는 부산시도 경상남도 부산시였어요. 제 기억으로 경남지역 대의원이 아마 75명쯤 됐을 거예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6대4 정도로 이겼어요.

김 : 경남에서, 오히려 이겼다는 것입니까?

한 : 그렇죠. 우리가 이겼죠.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그 때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쪽에서 움직인 사람은 최형우 전 장관입니다.

그쪽 사람들도 졌다고 시인했어요. 황낙주 의장도 시인했지요. 여담이지만, 왜 김대중이 이겼느냐. 제가 가서 설명하면 사람들이 김대중이가 똑똑하다. 실력은 김대중이가 낫다. 이걸 인정했어요.

막판에 이철승씨와 김영삼 측에서는 후보지명을 유진산 당수에게 위임하자고 하였고, 김대중은 당원에게 의사를 묻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산 민심이 김대중은 남자답다. 사람이 됐다. 당원의 뜻을 묻는 김대중의 자세가 옳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부산 다방에서 앉아있는데 마치 당원들에게 불던 김대중 바람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DJ와 YS, 40대 기수론

김 : 당시 정당사에서는 40대기수론이 제일 유명할거 같습니다. 71년 대선을 앞두고. 또 그때 후보경선을 아름다운 경선이라 이야기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한 : 그 때 야당은 인물 부재상태였습니다. 1967총선 이후 71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서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 박사를 신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영입을 해서 당수를 시켰어요.

그런데 유진오 박사가 건강이 나빠져서 물러난 겁니다. 그래서 유진산 당수가 당을 맡게 됐는데 ‘유진산은 사쿠라다’ 이런 소문이 나 있어서 야당은 희망이 없었어요.

우리는 김대중계를 조직하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영삼 당시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고 대통령 후보 나가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측에서도 경선에 나선 겁니다. 그 때 그 유명한 ‘구상유취’라고 유진산 당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입에 젖 냄새나는 애들이 대통령하려고 한다고 말이지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탄생한 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렇게 조건을 만들어 주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김 : 당시에 대단히 치열했던 경선이라고 아직도 회자되는데?

한 : 치열했죠. 민주당은 장면박사와 조병옥박사 때도 그랬지만 아주 치열했는데 그 때만해도 지역감정이 그렇게까지 없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남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거지요.

김영삼 후보 같은 경우 유진산계가 장악하고 있는데 대의원을 전부 내 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고, 우리는 그 중에 우리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유진산 당수가 김영삼 후보의 손을 들어주고 이철승씨가 떨어지고 나니깐,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으로 확정되다 싶은 분위기였어요.

전당대회 끝나기도 전에 신민당 사무실에는 김영삼 후보측에서 자축파티 하려고 맥주를 잔뜩 쌓아놓고 그랬어요.

김 : 1차 투표결과에서는 아마 YS가 1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역전이 된 겁니다. 김영삼 후보가 1위였지만 과반수를 못 넘었어요.

그 때 우리가 내 기억으로는 382표를 얻었는데, 이철승 지지자 표가 60표가 넘었어요.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씨 쪽하고 협의를 해서 그 표를 가져와서 우리가 이기게 된 겁니다.

김 : 그때도 DJ가 협상을 아주 잘해서 이철승 측의 표를 받을 수 있었네요

한 : 그때 그 기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철승 후보가 한 단계 위고, 그 다음에 김영삼, 김대중이라고 그랬는데,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이 똑똑하다 분위기가 있었어요.

1971년 대선 DJ 대 박정희, 지역감정의 뿌리

김 : 71년 대선같은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사실상 승자는 DJ 아니냐, 이런 말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 다음에 아예 유신으로 가버렸지 않느냐 이런 말도 있습니다.

dj 유세하는 모습




















한 : 그때 저는 경상남도에 있었습니다. 대통령 투표 당일 날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가요. 거기서 제가 그 때 이런 말을 들었어요.

투표장에 가시던 아주머니가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서 투표하는 건 마지막이라 했으니까 다음에 대중이 찍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 선거 막바지에 지역감정이 난무했는데 경상도 쪽에 투표 전날 밤에 전부 삐라를 붙였어요. ‘호남사람들이여 단결하라’ ‘김대중 대통령 만들자’ 이런 문구를 써 붙여놨어요.

영남사람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한 겁니다. 국회의장 이효상이 ‘경상도 대통령을 전라도에서 뺏어갈라고 한다’고 유세 때 그랬어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시작된 겁니다.

우리 쪽에서는 지역감정 이야기할 이유가 없어요. 왜 그러냐면 지역감정을 유발해서 이득을 봐야 되는데 호남이 수가 적으니깐 손해를 보는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왜 우리가 지역감정을 자극하겠어요. 경상도 수가 많으니까 그렇게 유세를 하고 그런 것이지요.

김 : 1992년 대선당시 부산 초원 복집 사건 같은 것이 이미 당시에 벌어 졌네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게 선거전략 측면에서는 위력이 있었던 것이네요. 이에 대응하는 전략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한 : 없었지요. 김대중 대통령은 유세를 가서 이효상 의장 발언을 규탄하면서 메뚜기 이마빡보다도 좁은 이 나라에 남북이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왜 우리가 동서로 또 갈라져야 하느냐고 이런 말 했어요.

김 : 선거에서 지역주의 공세는 저쪽에서 취한 거네요.

한 : 그렇지요. 지역감정을 저쪽에서 유발했지요,


당시 YS의 DJ선거지원에 대한 일화

김 : 당시 YS가 기록에 의하면 전국을 돌면서 열심히 도와주었다는데, 사실입니까?

한 : 우리가 후보가 되서 첫 유세를 한 곳이 부산 구덕운동장인데 YS가 '내가 1차에선 이겼는데 2차에선 배신자가 나와서 졌다.

언제가는 내가 대통령 후보가 돼서 이 자리에서 나와서 지지를 부탁할 것이다' 라고 했어요. 자기 얘기만 했어요.

당시 김대중 후보는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대한민국 민주주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부산구 목포동이다 그랬어요.

서울특별시에서 압승을 하고 부산에서 김영삼이 앞장서고, 목포에서 김대중이 앞장서면 이긴다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신민당 후보를 지원해달라 이런 연설을 했죠.

1978년~1981년 3번의 감옥행, 모질던 시련의 세월

김 : 그때부터 85년도 DJ가 다시 귀국 하실 때까지 상당히 고초의 시절을 겪게 된 것으로 아는데 한 대표도 당시에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법정에서도 태연한 모습
한 : 그 기간이 횟수로 16년이에요 김대중 대통령이 87년에 정치를 재개했으니깐 72년 유신 이후 횟수로 16년입니다. 16년이면 초등학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할 연간입니다.

정치인으로 말하면 16년 공백이란 것은 젊었을 때 공부를 해야 될 나이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교도 못 다니고 다 지나간 겁니다.

그렇게 비유가 되요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이 그 과정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하고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어요.

1974년도에 유진산 당수가 돌아가시고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총재가 처음으로 탄생했는데 동교동은 야당의 장래를 위해 이철승씨보다는 YS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동교동에서 dj와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교동에 연금됐을 때도 적극적으로 YS를 밀었어요. 조윤형, 이기택을 불러다가 사퇴하고 김영삼을 밀어라 이렇게 해서 김영삼 총재 탄생을 도왔어요.

내 기억으로는 79년도 박정희 대통령 저격당하기 전 그렇게까지 민주주의를 위해서 라이벌관계를 떠나서 도와줬어요.

김 : 그때 왜 감옥을 가 계셨습니까?

한 : 제가 78년에 감옥을 갔는데 죄명이 공무집행방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계시다가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왔어요.

그때가 제 기억으로 77년 12월입니다. 서울대학병원에 계신데 우리가 78년 1월 1일날 병실 앞에서 세배 좀 하자고 들어갔는데 교도관이 나와서 못 들어오게 해요.

그걸 무시하고 김옥두 전 의원이 밀어붙이고 들어가니깐 공무집행방해죄로 나는 9개월 살다가 나왔고 김옥두 의원은 1년 살다 나왔어요. 1월 3일 연행되서 9월 30일날 집에 돌아 왔었어요.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서 김대중 대통령을 석방했어요. 서울대학병원에서 동교동 저택으로 모셔왔는데 그 때는 종로5가에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목요일이면 목요기도회를 했는데 성명서를 내가 돌렸는데 그게 긴급조치위반으로 연행되었어요.

그래서 78년 12월 30일 연행돼서 79년 12월3일 집에 돌아왔어요. 그렇게 두 번째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다음에는 80년 5월 17일 전국 계엄을 선포했지요. 밤에 우리 동교동 사람들을 김대중 대통령부터 굴비처럼 엮어서 전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고 갔어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그 때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공동피고가 되서 81년 8월 15일날 석방되서 집에 돌아 왔어요. 그래서 내가 3번 감옥살이 했어요.

2부 다시 전선에 서다,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

4자필승론의 주창자는 바로 ‘나’

김 : 그래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전력했음에도 불구하고 50세 중반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습니다.

한 : 88년도 출마 등록을 했는데 감옥 3번 간 것 중에 1번이 복권이 안되서 투표 나흘 앞두고 등록취소가 됐어요. 그 때 국회의원이 못되고 14대 때 92년도 처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김 : 이 때 13대 총선이 처음으로 흔히 말하는 지역정당 출연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는데, 87년 대선에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단일화가 되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많지 않습니까?

한 : 역사에서 가정이란 필요 없지만, 김대중도 ‘양보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피력하셨다고 나도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하지만 당시 대세가 양 김 중에 하나가 양보해야 하는데 왜 김대중이 양보 안하나? 김대중이 YS보다 훨씬 사려분별이 있고 역사의식이 있는데 왜 양보안하나 이랬어요. 그때 저는 4자필승론을 주장 했어요

김 : 아! 한 대표가 그렇게 주장하신 겁니까?

한 : 네, 4자필승론을 그 때 당시 제가 만들었는데 지금 국회부의장하고 있는 문희상 부의장하고 같이 만들었어요.

나이나 민주주의 투쟁을 해온 관록, 세계적인 명성이나 준비된 면이나 당연히 김대중이 해야 한다, 더군다나 노태우, 김영삼 후보가 영남출신으로 서로 싸우기 때문에 호남이 뭉쳐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4자필승론이 타당성이 있다.

그렇게 우리가 주장했어요. 지금은 문건 다 없어졌지만 당시 밤새 머리를 짜고 만들어서 김대중에게 드렸어요.

김 : 이해찬 전 총리가 말씀하시길 당시에 비판적 지지를 하셔서 당시에도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했어요. 선거가 진행되면서 이렇게 가다가 진다 그래서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이라 보고 그 얘기를 했는데 김대중 측근들이 4자필승론으로 똘똘 뭉쳐있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체념을 했다는데 당시 재야세력들의 이야기들이 기억 나십니까?

한 : 재야세력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나 모르겠어요. 김대중에게 직접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 했더라도 그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4자필승론을 만들었는데요. 그걸 받겠습니까. 내가 대통령 선거를 4번 치렀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나는 우리가 진다는 걸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반드시 이긴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나는 거의 맹신하다시피 한 논리가 있어요.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 반드시 된다. 왜 되느냐.

하느님이 김대중을 5번 살려줬는데 그 인생이 의미가 없다면 왜 그렇게 여러 번 살려줬겠나,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살린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이 살려주셔 겠느냐, 그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선거 때마다 떨어진다는 생각 한 적이 없어요.

김 : 그 당시 4자필승론을 표로 계산해봤습니까?

한 : 당시에 어떻게 표로 구체적으로 계산하겠습니까만, 전체적인 유권자 분포도 조사하고, 민주화투쟁 경력이 YS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았고, 세계적인 관심도 김대중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80년 1월초 뉴스위크에 지금 당장 대선을 실시하면 김대중이 된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김 : 4자필승론이 지금과 같은 여론조사가 있었다면 상당히 판단하는데 도움이 됐지 않았을까요?

한 : 그렇겠죠. 그때도 지금처럼 발전한건 아니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는 있었죠.

(편집자 주 :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군사독재 시절에서 여론조사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한 대표는 유권자 자신이 솔직한 정치적 의견을 전화로 피력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음)

1988년 총선, 평민당의 바람

김 : 1987년 대선패배이후 당의 존립이 위협받았다고 들었습니다. 1988년 총선에서 평민당 바람이 불었던 걸로 아는데 당시 상황은?

한 : 그 때는 경상도나, 전라도나, 충청도까지도 어떻게 하면 대통령을 차지할 수 있나 이건 염원이었습니다.

전라도는 박대통령 18년 동안 푸대접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대통령을 가져보자는 전라도민의 염원입니다. 전라도는 배척하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소외에 대한 한풀이입니다.

당시 분위기는 후보 단일화의 실패책임으로 김대중 책임이 더 크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운신폭이 줄어들었지요.

당시 1988년 총선을 앞두고 YS 총재직 사퇴후 잠적, 김대중 총재도 사퇴하는 등 어수선하였습니다.

그 때 대부분이 당선자체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국민이 살려주신 겁니다. 평민당은 전라도를 싹슬이 하였고 서울을 석권하여 서울에서 1당이 되었습니다.

국민이 살려주신 겁니다.

당시 일부에서 평민당을 지역당이라고 폄하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떻게 전국팔도 출신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 1등한 평민당이 지역당이냐 하고 항변하면서 다녔던 걸 기억합니다.

(인터뷰는 3부로 계속 이어집니다.)

김능구 대표와 인터뷰를 하는 한화갑 대표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