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공천...“당 지도부가 아닌 당원에 의한 예측가능한 제도”
민주당, 비례연합창당...“소수정파 원내 진입, 통합당 과대 의석 막기 위한 방편”
김민석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통해 정권재창출하고 돌아오려 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가 폴리뉴스와 정국진단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이은재 기자>
▲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가 폴리뉴스와 정국진단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이은재 기자>

 

[폴리뉴스 권규홍 기자] 21대 총선에 서울 영등포구을 선거구에 출마를 선언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8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선거사무소에서 ‘폴리뉴스’ 김능구 대표와의 ‘정국진단’ 인터뷰를 가졌다.

김 후보는 이날 총선을 앞둔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을 두고 “혁명적 방식이 아닌 제도에 의한 꾸준한 개혁의 방식으로 이른 과정이기에 민주당은 그 길이 맞다고 본다”며 공천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날 김 후보는 당의 총선 공천작업을 비롯해 최근 이슈로 떠오른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 창당, 더불어민주당으로의 복당 과정,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해 소탈한 심경을 밝혔다.

김 후보는 당의 시스템 공천 개혁에 대해 “저는 정당이 발전할수록 가급적 100% 당원 경선으로 당의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원에 의한 정책 결정이 맞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 당이 그동안 발전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당원에 의해 예측 할 수 있는 제도, 당 지도부의 정무적 판단, 입맛대로의 공천이 아닌 룰을 정한 공천. 잘못하면 감점을 하고 기회 주려면 가점해서 링 위에서 붙이는 방식. 그것이 시스템 공천이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민주당이 비례연합정당 참여를 결정한 것을 두고는 “애초부터 바람직한 길은 아니었지만 이게 사필귀정이 된 거 같다”며 “미래통합당이 황당한 카드를 꺼내 대응을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결과를 놓고 보면 통합당이 꾀를 써서 완전히 꼬였고 오히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원래 취지에 맞게 소수 정파의 원내 진입 길을 열고, 통합당이 과대 의석을 가져가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진행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날 김 후보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간 일에 대해 “단일화를 통해서 정권 재창출하고 돌아오겠다. 그것이 민주당 명맥을 지키는 길이다고 했다”며 “후보 단일화 작업을 위한 선택은 그때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어렵지만 제가 아니라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수받을 선택도 아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께서 후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셨다”며 “당시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고, 단일화를 성사시키면 된다고 생각해서 굳이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지지 철회를 하면서 완전히 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예측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고 회상했다.

김 후보는 그 이후의 행보를 두고 “바닥을 기었다. 정치적인 야인생활이 길었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며 “개인적으로는 지하실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에 공부를 놓지 않아서 미국에서 변호사도 하고 중국에서 석사도 따고 NGO 활동도 하고 다큐멘터리 감독도 해서 영화제 레드카펫도 밟고 다양한 일을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김 후보는 2016년 자신이 이끌던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의 통합을 이루고 추미애 당 대표시절 민주당에 복귀해 민주연구원장을 지냈고 이번 총선에서 본래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구을에 복귀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는 1964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시절 총학생회장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을 지휘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15, 16대 총선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재선의원이 되었다. 이후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일조한 뒤 정계를 잠시 떠났으나 21대 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민주당 경선에서 현역인 신경민 의원을 이기고 영등포구을 공천을 받았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가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진=이은재 기자>
▲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가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진=이은재 기자>

 

<이하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을 후보와의 일문일답>

Q 예전부터 시스템 정당을 강조하신 걸로 알고 있고 현재 민주당이 시스템 공천으로 공천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현재 시스템 공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밋밋하단 평가도 있다.

제일 중요한건 저는 오래전부터 당원 주권론자를 자임했다. 지난 2002년 국민경선을 제가 디자인했는데 조금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당시 당의 총무국장을 하셨던 정창교 씨와 둘이 5대5 국민경선 실무 작업을 했다. 그 당시 틀이 지금까지 이어졌지만 저는 정당이 발전할수록 가급적 100% 당원 경선으로 당의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원에 의한 정책 결정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이 발전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시스템 공천의 방향에 대해 최근에 이해찬 대표도 말씀하신 바 있다. 그게 당연하다.

당원에 의해 예측 할 수 있는 제도, 정무적 판단에 의한, 그때그때 지도부 입맛대로의 공천이 아닌, 인위적인 물갈이가 아니라 룰을 정한 공천. 잘못하면 감점을 하고 기회 주려면 가점해서 링 위에서 붙인다. 이것이 시스템 공천이다.

물론 그게 개인적으로는 기분 좋지는 않지만, 정당의 혁신이 이미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제도에 의한 꾸준한 개혁의 방식으로 이르는 과정이기에 민주당은 그 길이 맞다고 본다. 미래통합당의 김형오 위원장의 공천이 잘라내는 맛은 있지만, 공천 과정에선 논란이 있다. 적어도 저희는 그런 논란은 없다. 아무튼 시스템 공천을 통해 과연 바뀔까 싶은 현역들이 바뀌고 있다. 수도권 후보들만 봐도 그렇고 불가피한 발전 과정이라고 본다.

Q 최근 여당은 전 당원 투표를 통해 비례연합정당 참여를 결정했다. 일부 의원들도 반대했지만, 다수는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탄핵 세력의 제1당을 막으려면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그냥 그대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바람직한 길은 아니었지만 이게 사필귀정이 된 거 같다. 미래통합당이 워낙 황당한 카드를 꺼내서 대응을 고민하다가 오늘까지 온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통합당이 꾀를 써서 완전히 꼬였고 오히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원래 취지에 맞게 소수 정파의 원내 진입 길을 열고, 그러면서 미래 통합당이 과대 의석을 가져가는 것을 막자는 의견에서 비례연합정당을 하자는 가능성이 당내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본다. 최종적으로는 투표를 해봐야겠지만 현재까지 과정은 그렇게 진행된 것 같다.

Q 당에 돌아온 건 추미애 장관이 당대표로 있던 시기에 복귀하셨다.

당에 돌아온 건 이렇게 된 것이다. 제가 정치를 안 할 당시 2014년에 안철수, 김한길 두 분이 합당하면서 새정치연합이 만들어지고 민주당 이름이 버려진 적이 있다. 안철수 전 대표가 ‘민주’ 이름이 들어가는 걸 극구 반대했다. 전통적으로 보통 통합하면 민주당 약칭을 붙이는 게 우리의 전통인데 민주가 없으니 지지자들이 굉장히 불안해했다.

당시 이낙연 전 총리의 정무 실장을 지냈던 지용호 전 실장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큰일 났다. 지금 당원들 걱정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저는 민주당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 민주당 이름에 대한 애정도 강해서 김대중 대통령 때 새천년민주당 창당 작업도 한 적이 있다.

그때 김 대통령이 국민회의로 정계 복귀했다가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이름 되찾은 것을 굉장히 기뻐하셨다. 민주당 이름이 당원들에겐 그런 상징성이 있다. 저는 그래서 민주당의 이름을 보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까운 분들과 모여서 민주당을 창당했다. 그게 이름을 살리기 위한 민주당 창당이었고 그 취지를 나중에 오해 안 받으려고 김원기, 정세균, 권노갑 야권의 세 원로에게 미리 이야기도 해뒀다. 그때 제가 “나중에 반드시 민주당 이름은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으니 제가 보관하겠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그러면서 농담으로 “허경영 씨 같은 분이 민주당 이름을 가져가면 어떻게 하냐”고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 이름으로 지방선거 공천을 받으려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나중에 통합될 때 쓰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박물관에 보관하고 민주당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모임처럼 유지해놓자 했다. 그게 벌써 2014년쯤 일이다. 그 이후 2년 이상을 십시일반으로 보통 사람들이 민주당을 끌고 갔다. 제가 대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추미애 당 대표 때 문재인 전 대표가 저에게 “이젠 통합할 때가 된 것 같다” 하셨고 이후 추 대표에게도 권하셔서 그 중재로 통합을 결정했고, 당에 복구했다. 아무런 요구 조건 없이 복귀했다.

그것을 현재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김민석은 자기가 불러들인 게 아니라 문 대통령이 나에게 붙여놨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에 그렇게 되고 당 대표 특보단장을 하다가 대선 본부장을 하고 정권교체를 하고 민주연구원장하고 임기 2년을 마쳤다.

Q 사무실 보니 뒤에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세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있다. 정치 시작을 김대중 대통령의 영입으로 시작하셨다.

1990년 당시 노무현, 김원기 의원들이 속했던 ‘꼬마민주당’ 시절부터 시작했다. 이후 1991년에 통합된 ‘민주당’이 세워지고 김대중, 이기택 대표 시절 처음 출마했다. 그때 첫 시작부터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치를 배웠다. 거기서 초선, 재선하고 집권당 새천년민주당 시절 당 총재가 현역 대통령이 되셨을 때 제가 당 총재 비서실장하고 그랬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 마지막 총재직 사퇴 기자회견문을 제가 썼던 기억이 있다.

Q 당시에 차세대 유망 정치인으로 늘 주목받다가 2002년 대선 때 정치 인생에 고비가 오셨다. 당시에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가 단일화를 해야만 당시 대선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후보 단일화를 끌어내기 위해 후보님이 정몽준 캠프로 가서 단일화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엔 비난이 엄청 거셌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그때 당시의 성명서가 남아 있다. 잠시 떠나서 단일화를 통해서 정권 재창출하고 돌아오겠다. 그것이 민주당 명맥을 지키는 길이다고 했다, 후보 단일화 작업을 위한 선택 그때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어렵지만 제가 아니라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100점짜리 선택도, 즐거운 선택도, 박수받을 선택도 아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께서 자서전에 그때 일을 쓰셨다. 당시 ‘2002년에 김민석이 그렇게 한 것은 단일화를 해야만 정권 창출 할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이었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김민석 본인은 어렵게 되었다’고 쓰셨다.

그 후 노 대통령 퇴임하시고 봉하 찾아갔을 때다. 2008년에 정세균 대표 때 최고위원으로 잠깐 선출됐었다. 당시 노 대통령께서 ‘대의원의 선택으로 정리됐다’ 본인 자서전에서도 그렇게 쓰셨고 저를 만나서도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

Q 그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모두가 알게 되었나?

그렇다 그때는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고, 단일화를 성사시키면 된다고 생각해서 굳이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 언론에도 한 번 나왔는데, 제가 주변에서 단일화가 안 된다는 걸 성사 시켰다. 이후 ‘거봐 된다고 했잖아’라고 단일화 자리에서 한 발언이 기사로 나간 적 있다. 잠시 비판은 받아도 성사가 되고 나면 ‘그래도 김민석이 일을 해냈구나’ 이런 평가도 받고 천천히 명예를 회복하면 되겠다고 했는데 정몽준의 지지 철회라는 누구도 예상 못 한 사건이 있어서 그 일로 완전히 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정말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20년 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사람은 하늘을 무서워하고 정치인은 국민을 무서워 해야 한다’라는 거다. 하늘과 국민이 제일 무섭고, 감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예측 못 하는 상황이 있고 정치인이 아무리 정치 공학을 아무리 해도 전혀 생각 못 하는 상황이 온다.

Q 국민들은 방금 후보님이 표현하신 지난 20년 세월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해 할 것 같다.

바닥을 기었다. 정치인 김민석은 끝났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런 정치적인 야인생활도 길었고 경제적 어려움도 많았다. 가정적으로 보면 한 번의 이혼도 겪었고 재혼도 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사실 그렇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지하실에 있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인적인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시간에 놓지 않았던 건 공부였다. 미국 가서 변호사도 하고 중국에서 중국법 석사도 하고 한국에 와서 어린이들 관련한 NGO 활동도 했고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한번은 다큐멘터리 감독을 해보고 싶어 그것도 찍어서 서울 노인영화제 레드카펫도 밟아보고 상도 받았다.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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