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만 남고 ‘사람’ 은 사라진 2차 가해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0.7.13
▲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0.7.13

 

피해 여성을 향한 2차 가해는 생각보다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고소인의 호소는 외면당했고, 박원순이라는 존경받는 인물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온갖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추행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뒤바뀐 목소리를 내는 대열에는 진보적 학자들, 팬덤을 거느린 방송인들, 그리고 의사, 맛 칼럼니스트, 심지어 여검사까지 가세했다. 박 시장과 함께했던 많은 586 기성세대들도 피해 여성을 의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모두가 ‘진보’의 숭고함을 말하던 사람, 입만 열면 약자, 인간에 대한 예의, 배려, 정의, 양성평등, 그런 말들을 즐겨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180도 달라진 것일까. 가해자가 고소장 제출 사실을 알고 나서 하루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인정한 것인데, 어째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피해 여성을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반인간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동안 자신이 ‘진보’임을 자처해왔던 사람들이기에 더욱 충격적이고 참담하다.

한평생 가운데 고인이 훌륭한 삶을 살았던 시간들이야 기억하고 추모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성추행이 한 인간을 고통 속에 가두는 나쁜 범죄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인과 얽혀 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 지원을 받았던 사람들, 같은 진영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이들이 그 연줄의 고리를 끊고 냉정하게 “성추행은 잘못”임을 말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진영’만 남고 ‘사람’은 사라진 결과다. 모든 것을 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결과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던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성추행을 두둔하게 되는 엽기적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저자 에이미 추아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부족주의로 후퇴하기 마련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 방어적, 징벌적이 되며, 더욱더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신들 집단의 일원이었기에, 집단을 지켜야 하기에, 성추행이 잘못된 일임을 이들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폴 벤느의 말처럼 우리는 투명한 어항과도 같은 담론 속에 갇혀있는지 모른다. 진영이라는 어항 속에 갇혀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이 어항이 어떤 것인지, 심지어 거기에 어항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항 속에서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특정한 진실만을 말하도록 구축된 주체들이다. 주체는 오로지 어항 안의 진실을 사유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도 어항 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어항과도 같은 존재가 권력인 것이다.

이번 사건에 관한 기성세대들의 설명은 무척이나 장황하다. 차마 성추행을 두둔할 수 없기에 중립을 취하는 모양새를 취하려다 보니 언어들이 모호해지고 꼬여 버린다. 성추행 사실을 놓고 난데없이 칸트나 데리다를 인용하는 학자의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고인과 한 시대를 공유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의 성추행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삶을 함께 부정하는 것 같은 집단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차마 성추행을 옹호하는 말은 직접 꺼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올린 2차 가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눈에 덜 띄는’ 동조를 한다. 성추행이 잘못인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고소까지 해버린 피해 여성은 이들에게 여전히 미운 존재이다. 586 세대에게는 여전히 “내가 박원순이다.” 그러니 피해 여성은 고통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녀에게는 세상은 지옥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2030 세대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서울시장이라는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성추행’이다. 2030 세대는 애써 우회하지 않고 핵심을 곧바로 짚는다. 그들은 한사코 가해자를 감싸는 기성 세대를 납득하지 않는다. 박원순이라는 인물과 시대를 공유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이들은 그래서 고인의 삶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겠지만,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만은 그래서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고인과의 정서적 밀착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작동하지 못하는 기성 세대의 우를 범하지 않는다.

586 기성 세대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과거를 말하고 있고, 2030 세대들은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 무엇도, 자신들이 받아야 할 고통을 막겠다는 절박한 호소를 이길 수 없다. 책임을 묻고 심판하지 않으면 자신이 김지은이 되고 피해 여성 A가 될 것이라는 절박함은 기성 세대의 추억 돌아보기가 갖는 힘을 압도한다.

2030세대에게는 성추행의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당신들이 ‘진보 꼰대’들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을 지키겠다고 2차 가해에 동참하고 방조하는 기성세대들은, 2030세대가 보기에는 박근혜를 지키겠다고 나섰던 태극기부대와 다를 바가 없다. 기성세대가 2차 가해를 즐길 수록, 2030 세대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를 건너고 말 것이다. 그 다음은 젊은  세대에 의해 당신들이 심판당할 순서가 온다. 성추행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내로남불하고 이율배반적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586 세대가 쌓아왔던 자신들의 신화를 스스로 이렇게 무너뜨리고 말다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라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대가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파산해 간다는 사실이 허망할 뿐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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