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이태석(李泰錫) 신부 사망 11주년되는 날이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1962년 10월 17일(음력 9월 19일) ~ 2010년 1월 14일

로마 가톨릭교회 살레시오회 소속 사제 겸 외과 의사로, 아프리카 수단 남부(현재는 남수단)의 와랍 주에 있는 마을인 톤즈에서 교육 활동과 의료 활동을 펼쳤다. 세례명은 세례 요한으로, 톤즈의 돈 보스코로 칭송됐고, 톤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세례명에 성을 더해 발음하기 쉬운 쫄리(John Lee)로 불렀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 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중에서

'남수단의 슈바이처'로, '세례 요한'으로까지 불린다. '울지마 톤즈'로 알려졌다.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를 맞아 고향 부산에 '이태석 신부 기념관'이 조성돼 오늘 14일 개관식이 열렸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 신부 생가 뒤쪽 공간이다. 이태석 신부가 몸담았던 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가 기념관 운영을 맡았다. 섬김, 기쁨, 나눔 등 이 신부의 3대 정신을 계승해 다양한 기념사업과 행사를 통해 두고두고 기억할 예정이다.

'섬김'은 청소년 리더십 교육프로그램, '기쁨'은 다양한 문화사업, '나눔'은 지역사회와 연계한 사업이다.
현재 각종 기획 전시회, 청소년영상제, 추모음악회, 추모장학금 지급 등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기념관 1층 카페는 소외 아동이나 청년들의 무료급식이나 자립을 지원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기념관 오픈을 시점으로 서구청이 추진 중인 '톤즈 빌리지'도 본격화 됐다.

2014년 10월 이 신부 생가가 복원됐고, 2017년 7월 주민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이 신부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톤즈 점방'이 생겼다. 톤즈 점방 수익금은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가와 기념관 등이 들어선 이 일대에  '톤즈 문화공원'이 조성됐다.

"많이 사랑한 당신 앞에 조금 사랑한 우리가 참 부끄럽네요.
감사보다는 불평을 먼저 하고
사소한 어려움을 못 참고
이웃에겐 무관심하고
자신 안에만 갇혀 살았던 우리가
오늘은 더욱 부끄럽네요. "
... 이해인 수녀, 이태석 신부 추모시

1962년 9월 19일 부산 출생. 1981년 부산경남고등학교 졸업.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 졸업. 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1991년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받았으며 1997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했다. 2000년 4월 종신서원을 하였고 그해 6월 28일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Tonj)로 향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지로 불리는 수단의 남부 톤즈는 오랫동안 수단의 내전(內戰)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며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져 황폐화된 지역이다. 이태석 신부는 이곳에서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지붕을 엮어 병원을 세웠다.

또한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순회 진료를 했다. 병원이 점차 알려지게 되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 병원건물을 직접 지어 확장했다. 하지만 오염된 톤즈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가 매번 창궐하자 톤즈의 여러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난을 해결하기도 했다.

하루 한끼를 겨우 먹는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경지를 일구기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워 원주민 계몽에 나섰다. 처음 초등교육으로 시작한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차례로 개설하였고 톤즈에 부지를 마련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원주민을 치료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치료의 목적으로 음악을 가르쳤으며 예상을 넘는 효과가 있자 학생들을 선발하여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구성했다. 그 밴드는 수단 남부에서 유명세를 탔으며 정부행사에도 초청돼 연주했다. 2005년 그의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돼 제7회 인제인성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2008년 10월 톤즈 현지에서 이태석 신부와 함께 헌신하던 의사 신경숙(현 구미순천향대병원)에게 혈흔이 발견돼, 그해 11월 휴가차 입국하였을 때 순천향대병원에서 종합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그의 암은 이미 간으로 전이돼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항생제를 투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항암치료에 잘 반응할 것이라며 완치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또 그렇게 기도했다.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에 머물며 투병생활을 했으며 수도원은 자신이 머물기에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며칠간 양평에 머물면서 단식과 생식으로 건강을 회복하려 했지만 증세는 나빠졌다.

결국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4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투병생활 중 2009년 12월 17일 제2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을 수상했다. 그가 작곡한 묵상(默想)이 대표곡이며 저서로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집필한 에세이집 '친구가되어주실래요 2009'를 남겼다.

또다른 1월14일이 있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박종철열사 34주기 추모제'를 1월 14일 오전 11시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에게 고문을 받다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던' 고(故)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였다. 

34년이 흘렀다. 작년 2020년에 박종철 열사 33주기를 맞아 마지막 제사를 올렸다.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87년 한국사회 민주화에 '불씨'가 됐다.

 '죽었지만 모두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생명이다."

2021년 겨울, 대한민국은 '정인이 사망'으로 온통 뜨겁다.
마산 앞바다의 생명, 세월호의 생명,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노동현장에서...... 생명들

머지 않은 장래에, 사람들이 오늘 1월14일을 '정인이의 날'로 부끄러워할까?

 


오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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