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귀환을 바라보는 시각들

홍범도장군 유해가 올해 광복절을 맞아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귀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78년만이다. 청산리대첩 후 101년 만이다. 장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대단하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대한민국의 국민들로부터도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러나 냉정한 평가가 있는 것도 현실이며 생각해볼 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한인계 귀화한 러시아인, 생계형운동가, 독립운동가를 핍박한 사람 등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지적들도 있다.

홍범도 장군, 그는 무학의 고아 머슴 출신이다. 일꾼으로 일하다가 품삯이 밀리자 고용주를 살해하고 도망가, 산사 승려를 하면서 비구니를 아내로 얻었다. 이후 절을 나왔다.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경위는 강원도에서 포수하다가 일제가 수렵 금지령을 내리자, '그러면 이 총으로 일본놈이나 잡겠다'고 열받아 포수들을 모아 독립군을 조직했다.

키가 190cm였고 덩치가 있어 독립군 대장을 했지만, 그의 항일 전투 능력은 열번 싸워 한 두번 일본군 괴롭히고 나면 일곱, 여덟번은 대패하여 부대원들 목숨이 위태로워 삼십육계 줄행랑이 보통이었다.

당시 소련 자유시 참변 직후 소련 공산당의 무장해제에 불복한 독립군 상해파를 공산당 편에 서서 재판해 처단하는데 협력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 국적을 얻었다. 사실상 반민족적 부역 행위였다.

사진에서 차고 있는 권총은 레닌이 준 것인데 나중에 사할린 파 독립군 출신 두 사람에 의해 '공산당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가 부러지는 폭행을 당하자, 그 총으로 모두 살해했다.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고려인들과 함께 강제 이주 당했다. 이후 고려극장 수위로 편하게 일하고 풍족한 연금을 받으며 고려인 사회에서 땡감(?) 노릇하다 자연사했다.

죽을 때까지 소련 공산당 당원이자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그런데 박정희 시절인 1961년 건국훈장이 수여됐다. 문재인정부도 구국의 영웅이라며 유해를 모셔 옮겨왔다.

홍범도 장군을 보는 위의 내용과 같은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 수위 시절 주변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저서 ‘홍범도일지’를 작성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이 저서를 토대로 연극 ‘홍범도’를 공연했는데 이 공연을 본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계면쩍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레닌과 스탈린 시절, 그리고 박정희와 문재인 시절,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홍범도를 과대 포장한 내용은 없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홍범도의 고향이 북한인데 굳이 남한으로 모셔와야 되는지도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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