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면희 칼럼] 소크라테스로 조망하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인 '자유'의 가치

2022.09.01 02:46:01

소크라테스 방법과 정치적 의미

2020년 가을 한가위 무렵이 무척 흥미로웠다. 당시 KBS특집 방송에 출현한 가수 나훈아의 신곡 “테스형”이 대중에 회자되면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속성이 있지만, 특별하게는 일부 가사가 정치사회적 상상과 공감을 자아낸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대학 시절 소크라테스를 접하여 놀라운 충격을 받았던 필자로서는 처음에 “테스형”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몰랐는데, 회자되던 노래를 듣고 나서야 소크라테스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구절이 여러 가지, 특히 내로남불이라 비판을 받던 당시 문재인정부의 정치 행태를 꼬집는 것으로도 확대되어 연상되었고, 더 나아가서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이를 듣고 공감하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바도 있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출중한 인물이 적지는 않았다. 공자는 “시 삼백 편을 읽노라면,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시경을 예찬하였는데, 스스로도 제자들을 가르치며 주옥같은 말을 남김으로써 후세대에 4서3경이 전수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 동양의 고전을 읽다보면 깊은 혜안에 감복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만 비판적으로 탐색하면 문제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사회 서열화나 가부장제를 깨뜨릴 통렬한 성찰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대로 갈수록, 특히 주자 이후에는 더욱 더 공맹 등 선현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는 것에 대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어느 누구도 주자의 고전 해석에 이의를 달지 못하는 문화적 분위기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이런 연유로 동양에서 민주주의나 공화정, 또는 페미니즘 등은 피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서양의 소크라테스는 유독 달랐다.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은 대화 방법에서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방법은 간략히 두 계기, 즉 비판적 논박을 거쳐 산파술로 전개된다. 비판은 대화 상대방으로 하여금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통해 무지의 자각을 일깨우는 단계이고, 그 바탕 위에서 산모의 순산을 이끌듯이 참된 지식을 찾아가는 창의적 산파술의 단계로 진입한다. 이때 비판은 세상(상대방)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바를 진리나 참된 지식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언급이어서 비난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비난은 자신(또는 집단)의 배타적 이익을 위하거나 스스로의 우월감에 젖어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왜곡되게 폄하하거나 꾸짖는 부덕한 행위로서 우리 정치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인 반면, 비판은 참된 것을 찾거나 창의적 새 지평을 여는 산파술과 결부됨으로써 반드시 필요한 성찰의 기본 단계이다. 이런 방법적 지혜를 전수받은 서양은 수용하는 정도만큼 혁신적 변화의 도모가 가능했고, 이로써 근대화는 물론 민주화와 인권 신장까지 도모할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 이후 강조되는 자유의 가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첫 머리에서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보수적인 국민의 힘 정당 출신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선언이다. 이어서 “다양한 위기가 복합적으로 인류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같은 영향 속에서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임을 직시하면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일갈하였다.

반지성주의가 불쑥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지나친 집단의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으로 적시하였다. 반지성주의는 미국 사회에서 1950년대에 일어난 매카시즘, 즉 광기 어린 반공주의의 야만적 행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역사학자 호프스태터가 쓴 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주의에 근거하여 열등한 인종을 청산하는 사회적 억압 분위기를 조성하여 실제로 이를 실행한 사건 역시 전형적 반지성주의라 할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그 용도 의미에 비추어볼 때, 우리사회에도 해당 사례가 적지 않다. 멀리 조선시대에 자유롭게 비판적 의견 개진을 하던 학자들을 옥죈 사문난적의 억압 시절을 꼽을 수 있고, 가까이로는 문재인정부의 조국사태 당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윤대통령이 몸 담았던 검찰 역시 정치권력이나 금력, 지배적 언론을 업고서 표적으로 지목된 대상에 대해 술수와 조작으로 불의한 짓을 수 없이 저지른 것 역시 반지성주의의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대통령이 이를 거론한 만큼 아예 적극 드러내어 향후 이런 행태가 축소되도록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가 자유로운 비판에 언제든 열려 있어야 하는데, 윤대통령 역시 취임사에서 최고 핵심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대통령은 취임사에 이어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은 …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다시 새김으로써 “자유를 찾고, 자유를 지키고 자유를 확대하고, 또 세계시민과 연대하여 자유에 대한 새로운 위협과 싸우며 세계 평화와 번영을 이뤄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큰 틀에서 공감하는 바이다. 더군다나 지금 세계가 권위주의적 국가와 자유국가 간의 첨예한 대결로 조성되고 있는 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자유의 가치가 매우 소중한 것이긴 해도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또는 그것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해도 되는 것인지 살피지 않을 수는 없다.

자유의 가치를 둘러싼 좌우 정치철학적 논쟁

인류 역사가 자유를 위한 투쟁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의 자유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자유주의에서 적극 피어났다. 본격적 물꼬는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에 의해 펼쳐졌는데, 인간이면 누구나 천부적으로 자유와 생명,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분별되었다. 이로써 중세 봉건제의 불합리한 신분제가 종식을 고하였고. 자유의 물결이 형성되면서 프랑스대혁명을 촉발시켰다.

자유는 다양한 의미의 분화로 혼란도 초래하지만, 근대화 과정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것의 둘로 분별되었고, 현대에는 이사야 벌린의 언급으로 식별되고 있다. 벌린에 따르면, 소극적 자유란 나의 행위가 누군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누리는 자유인 반면, 적극적 자유는 개인으로서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희망 속에 내 뜻으로 결정한 삶을 살 자유를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소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적극적 자유는 무엇인가를 위한 자유라고도 할 수 있다.

전통적 자유주의는 벌린 스스로도 그랬듯이 소극적 자유에 방점을 찍으면서 적극적 자유와는 거리를 두려는 입장이다. 사실 토마스 홉스도 인간이 야만의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줄 군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그 바탕에 개인의 자유란 맥락상 외부의 방해가 없는 상태라고 밝힘으로써 가장 먼저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소극적 자유에 근거한 전통의 자유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주문한 시장경제에 잘 부합하는 사조이다. 인간 각자가 경제 영역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영리 활동을 할 때 생산의 효율로 풍요에 이름으로써 만인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정부는 내외적으로 국민 각자의 안전을 지키고 공적인 사회 기간시설을 운영하는 것으로 국한할 뿐, 소극적 의미의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시장에 대해 간섭을 행하지 않는 작은 규모를 지향하게 된다. 자유방임주의(현대의 자유지상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초기 체제에서 부르주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착취가 극심하여 경제적 계급사회가 도래하였다. 자유주의가 처음에는 신분제 계급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지만,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만남으로써 이후에는 경제적 계급사회를 출현하는 데 적극 관여한 셈이다. 무언가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조성된 것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계급 없는 평등사회라는 이상적 희망 속에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고, 그런 맥락에서 자유를 달리 인식했다. 부르주아가 노동자를 착취하도록 자유롭게 둘 수는 없는데, 이럴 경우 어떤 사람은 자유롭지만, 다른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극적 자유 지평을 넘어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모두가 자유롭지 않다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 속에 “각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발전의 조건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다.”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천명하게 된다. 문제는 자본주의 타도 이후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소 불쾌하더라도 이해해아 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필연으로 상정했는데, 현실에서는 독재가 영구적 상태로 이행하여 인민의 자유를 부단히 유린하는 비극적 현실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 방법의 창의성과 새로운 자유 가치의 지향

자유를 소극적 의미로 좁게 가두는 선에서 제도와 정책을 짜는 한, 계급사회를 초래하거나 복지정책조차 외면하기에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윤대통령도 이런 문제를 다소 의식했는지 취임사에서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공동체 붕괴를 염려하면서 슬쩍 “모두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고, 연대와 박애의 정신을 가져야” 함을 내세우고 있다. 변두리로 언급한 것이지만,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조금은 넘어선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해결책으로 내세운 “도약과 빠른 성장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에 의해서만 이뤄낼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선언한 인물인데도, 최근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과학기술 주도의 경제발전이 불평등을 심화시켜서 중산층 몰락과 더불어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발전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제4차 산업혁명을 선언한 클라우스 슈밥의 적극적 권고에서 보듯이 과학기술에 가치 심기가 구조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때의 가치는 소극적 성격의 자유 개념을 넘어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철학적 문제의식 없이 소극적 자유의 존중에 안주하는 한,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가겠다는 윤대통령의 포부는 화려한 수사로 그칠 수밖에 없다.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가? 다시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요청된다. 자유 개념에 의거하여 좌우 낡은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였으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에 두 길이 부상한다. 하나는 존 롤스가 개척한 평등 지향의 자유주의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이클 샌델이 발전시키는 미국 건국 공화주의의 길이다.

칸트는 이성을 지닌 인간 각자가 다양한 조건 속에서 (선)의지를 갖고 준수하려는 도덕규칙이 보편적일 때 그것을 선택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하였다. 이로써 대륙법의 도덕적 기초가 마련되는 가운데 옳음을 행해야 할 인간 개인의 의무와 권리가 제시되고, 또한 목적의 왕국에서 자율로 행할 개인의 선택적 자유가 부상하게 된다. 현대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바로 칸트를 좇아 사회정의를 구축하였는데, 무지의 베일을 쓰는, 즉 편견 불식으로 보편화가 가능한 가설적 사회계약을 맺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로써 우선해서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의 권리는 모두가 누리게 하고, 다음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허용하되 관련된 직위에 누구나 공정하게 다가가게 하고, 자산은 최소 수혜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하는 것이다.

전임 문재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게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는데, 이 주장만으로는 롤스의 입장을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언과 달리 불공정했다고 평가를 받았는데, 부동산 정책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의도는 좋은데 전문적 식견의 부족으로 참사를 초래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소극적 자유의 지평을 넘어서고 또 케인스주의와 합세하여 미국의 진보 정책에 기여함으로써 복지국가를 지향하게 한 큰 장점이 있다. 문제는 다양한 기회 속에 선택할 자유의 권리를 부각시키는 데 따른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초기 코로나19 전염병이 창궐할 당시 마스크를 쓸 수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할 수 있고 지인들과 모여 파티를 즐길 수도 있을 때,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로운 권리를 갖도록 사회적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시민들이 포르노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관람할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이때 좋은 사회를 지향한다면, 사회가 포르노 영화보다 셰익스피어 연극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임을 시민들에게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의 자유는 그 자체로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자치나 공익, 공동선과 적극 결부되어야 한다. 이 길은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건국 당시 토마스 제퍼슨은 연방국가와 주정부, 시민으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자유 시민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 사안에 대해 가능한 한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자치를 하는 가운데 공동의 선을 도모하도록 미덕을 기르게 하는 데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헌법을 기초하면서 공화주의 이상에 따라 권력 분립이 견제와 더불어 공적 조화까지 이룸으로써 사회가 나빠지기보다는 갈수록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기획하였다. 샌델은 개인의 자유가 소중하지만, 그것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을 짓자면,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해당할 터이지만, 윤석열정부가 자유의 가치를 최고로 여길 때 어떤 유형의 것으로 식별하여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천명한 발언이 무늬 내는 것으로 그침으로써 국민에게 좌절을 안겨주거나 또는 책임 있는 성취의 방향을 향해 진척시킬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하리라고 본다.

한면희
현재 21세기공화주의클럽 상임대표이고 성균관대 초빙교수
전 창조한국당 대표(비대위원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전 녹색대학 대표, (사)환경정의 연구소장,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위원장
저서로 초록문명론, 동아시아 문명과 한국의 생태주의, 제3정치 콘서트 등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면희 (철학박사, 공화21 상임대표) plantlove@hanmail.net
ⓒ 폴리뉴스(www.poli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폴리뉴스는 인터넷신문위원회의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PC버전으로 보기

(07327)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71 동화빌딩 1607호 | 대표전화 02-780-4392
등록번호:서울아00050 | 등록일자 : 2005년 9월 12일 | 발행인:(주)이윈컴 김능구 | 편집인 : 박혜경
폴리뉴스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2000 (주)이윈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olinews@poli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