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외채상환 금모으기 운동
▲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외채상환 금모으기 운동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 해고는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기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재계 1위의 순양그룹 회장 진양철은 고용 승계를 왜 그리 반대하는지 묻는 막내 손자 진도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IMF 시기 부도 처리된 자동차회사의 인수전을 그린 드라마의 장면은 당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던 삼성과 현대의 모습을,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조합의 시위와 경찰의 폭력적 진압 장면은 2000년대 대우차 부평공장과 쌍용차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애써 묻어둔 옛 기억들을 건드린다.

25년 전 평범한 한 가족이 겪어낸 사건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되짚어보는 것이 드라마 시청자로서는 흥미로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아리다.

그 겨울의 생존법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가 IMF와의 합의문에 서명한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저 묵묵히 일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아무 잘못도 없이 희생을 요구받은 노동자, 서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편에서는 정글 같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오징어게임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연대와 저항의 길이 더 치열하게 모색되었다.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협상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협상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구제 금융을 받는 대신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비정규직을 받아들이게 된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조끼는 생존권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전장의 갑옷이었다.

그러나 한 줌에 불과한 나일론 조끼를 몸에 걸치고 헌법에 적시된 ‘단체행동권’이라는 행사하기까지 누군가는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는 감옥 밥을 먹었으며, 숱한 이들이 해고당했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52년이 지났지만, 이 나라 노동자 10명 중 8명은 노동조합을 가지지 못했다.

얼마 전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대부분 소득 상위 10%의 기득권층”이라며 “그러면서도 약자 흉내 내면서 주기적으로 파업한다.”고 비판했다. 100만 명이 넘는 민주노총 조합원 대부분이 고소득자라니 어디서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적어도 윤석열 정부가 강경 방침으로 대응해온 화물기사, 건설 노동자,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고 고된 노동 현장에서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저임금 노동자”라며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대응 방침만을 되뇌고 있다. 지난 6월 총파업 이후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과 사태 해결의 방안은 내놓지 않은 채 노조 혐오만 부추길 뿐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을 위해 강성 귀족노조부터 없애야 한다는 것이 정부와 보수언론의 변함없는 레퍼토리다. 세상에 어떤 귀족이 하루 20시간씩 운전대를 잡고 목숨 걸고 일하며 최저임금제(안전운임제)를 유지시켜달라고 거리에 나앉겠는가.

진보정치의 역할

경제위기 상황에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노동자, 서민들이 스스로의 정치 권력을 가지기 위해 진보정당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도 IMF 체제 이후였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같은 만행에 맞서려면 직접 힘 있는 정치세력이 되어야 함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눈만 뜨면 싸우다가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합심해 밀어붙이는 거대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살림살이는 나아졌는지” 물으며 서민의 삶을 챙기는 진보정당의 역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외치던 구호가 국회 연설로 울려 퍼지고, 선거를 통해 법과 제도를 바꿔내는 경험은 노동자, 서민이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웠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에 의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으로 한국사회 정당 민주주의는 크게 훼손되었고, 정쟁의 도구로 꺼내 드는 ‘종북몰이’라는 녹슨 칼은 윤석열 정권의 손에 여전히 들려있다. 종북세력은 협치의 대상이 아니라고 서슴없이 발언하는 윤 대통령은 취임 200일이 넘도록 야당 지도부를 만나지 않았다. 169석의 거대 야당을 따돌릴 때도 이 낡아빠진 칼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위기불감증

최근 가계부채가 1,870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 치웠고, 치솟는 금리와 '돈맥경화'로 인한 불안감은 금융과 건설업계를 비롯해 사방으로 번져나갈 모양새다.

더욱 큰 걱정은 각종 경제 지표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 고장난 채 내달리는 정치다. 이태원 참사에서 드러난 위기 불감증이 안전 관리에만 국한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11번째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화기애애한 희망가를 주고받는 장관들의 모습이 차라리 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재벌집 막내아들로 새로 태어나 과거를 다시 살아가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지난 역사를 거슬러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한국사회의 어떤 모습을 바꾸고 싶은가.

25년 전 겨울과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 사회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싶다면.

김재연

前 진보당 상임대표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
19대 국회의원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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