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정치적 격랑기였던 1981년 홍 의원님은 민한당 창당 주역이셨죠. 민한당으로 11대 국회의원에 출마, 첫 정계입문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민한당은 중정 자금을 통해 만들어진 야당으로 민정당 2중대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창당 상황과 당시 비화가 있으면 말해주십시오.

민한당 창당주역은 아닙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변을 당하고 정치가 전반적으로 재편될 당시에는 제가 중앙일보를 그만둔 지 5년째 되는 해입니다. 건설회사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따로 사표내는 게 귀찮아서 조그만 장사를 시작해서 사장을 할 때입니다.

말씀대로 명백히 군사정권이었고 내 사무실이 무교동 교통 좋은데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집합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변을 당한 다음에 김종태나 김도현이거나, 그때 당시에 언론사에 있다가 목 잘린 친구들이 그런대로 밥벌이를 하는 제 사무실에 늘 모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결정을 했던 거는 그 김종태 군이 앞장을 서서 결정한 거였습니다.

민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한당에도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 왜인고하니 그것 역시 군사정권에 부역을 하는 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멤버가 한 스무댓명 됐는데 대체로 합의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김종태씨가 워낙 설득력 있게 얘기를 하니까 누구도 이의제기를 못했죠.

저는 제가 겪은 거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민한당은 여하튼 창당과정을 밟아갔는데 총선을 앞두고 조직체 신청을 하던 마감날이었습니다. 그날 한 스무댓명이 제 사무실에 모였는데 김종태씨가 말을 완전히 바꾸어서 또 다른 결의를 했습니다. 이럴게 아니다, 우리도 63세대입니다. 우리도 어디엔가 교두보를 마련해야 되는데 민정당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민한당에 교두보를 마련하자, 그리고 김종태씨가 아주 지명까지 했습니다. 철학과 나온 최해성군이랑 사덕이 니가 들어가도록 해라, 워낙 엘러펀트하게 얘기를 하니까 다들 그 결정을 존중하게 됐고, 그게 아마 점심 먹고 난 다음이었을 겁니다.

실제로는 민한당이건, 민정당이건 우리한테 주목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 잘린 전직 언론인에 직업적인 낭인패거리들이니까, 그래서 두 사람이 이제 공천신청을 하기로 하고 얘기가 좀 늘어집니다만은 그때 우리 방에 나이 때문에 이제 좀 심부름 하는 격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최기선씨하고 박종웅씨였는데 내가 박종웅씨한테 집에 가서 내 신청서에 넣을 사진 있는대로 좀 받아가지고 오시오. 그래서 하여튼 그렇게 해서 시작을 했습니다.

다 빼고 얘기를 하면은 우리 방 63세대 대표격으로 신청하기로 했던 최해성이하고 저하고 중에 최종적으로는 저만 공천을 받았고 그렇게 참여를 했습니다. 아까 안기부 중정하고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한 10년쯤 지난 다음에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우리 대학 선배 한분이 계셨는데 한 10년쯤 지난 다음에 그 말씀을 저한테 했어요. 너 나한테 감사해야 된다, 민한당 공천신청 했을 적에 최종적으로 서베이를 하는데 너한테 대한 신원보증을 내가 섰었다, 그 선배가 내가 71년도에 순회특파원으로 유럽 거쳐서 아프리카에 갔을 적에 우간다에 계셨더랬어요. 그래서 한 일주일 정도 뭐 일이 아닌 인터뷰도 하고 그러면서 같이 어울려 지낸 적이 있었고, 당시로서는 대단히 반정부적인 얘기를 중정요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선배니까 내가 기탄없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마 굉장히 인상 깊었던가 봐요. 그래서 이런 자는 정치를 해도 무방할 것이다는 확신이 들어서 서베이 하는 멤버들 중에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따라서 누구도 보증을 안 섰는데 우연히 국내 들어왔다가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보증을 섰고, 그래서 니가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비추어보면 중앙정보부가 창당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2. 11대 의정활동에 특별이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11대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기억이 남는 거는 제가 했던 행동이 아니라 우리 한광옥 의원이 했던 일입니다. 대정부질의에 나와서 그때 호칭은 선생입니다만 김대중 선생에 대해서 정면으로 얘길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뭐 분위기도 어수선했더랬죠.

제가 했던 일은 뭐 지금은 별 얘기꺼리도 안 되는 겁니다만, 유신 이래 처음으로 예산심의에서 성역이었던 방위비 문제를 들고 나와서 방위비 삭감을 주장을 했고, 그게 유신 이래 처음이랬습니다. 말하자면 성역을 깨는 거랬고, 그해에 우리 김현규 선배께서 정책의장이 됐는데 그걸 끝내 관철을 했습니다. 물론 그 관철한데에는 이종찬 당시 여당 원내총무의 남다른 식견이랄까 그게 도움이 됐습니다.

3. 민한당에서 의원 몇 분과 가장 먼저 양김이 이끄는 신민당으로 가시는 결단을 했는데...

미리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제가 보고 들은 겪은 일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1대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김현규 의장이 의원회관, 지금 KBS별관으로 쓰는 자기 방에서 커피를 한잔 하자, 그래서 갔습니다. 갔더니 두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김현규 선배랑 박관용의원이랑.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민한당 공천 받지 말고 양김이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당에 참여를 하자, 그런거랬습니다.

전 뭐 그 얘기 떨어지자마자 그렇게 합시다, 그랬습니다. 박관용 의장이 요즘도 농담조로 자기 죽을 일도 1초 안에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는데, 실제로 그때 분위기는 양김이 창당하는데 가는 것은 자살행위로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그 자리에서 결정을 했던 이유는 흔히 언론에서 말하는 대로 민주대의를 쫓아가지고 한건 아닙니다. 제가 11대 공천을 받는 과정에서 사실은 몇몇 분들한테 크게 도움을 받았는데, 언론계에 있는 세 사람 후배 기자, 당에서는 김현규 의원, 신상우 선배 두 분이었습니다. 김현규 선배 도움이 아니랬으면 공천을 못 받았을 거고 못 받았으면 내가 국회의원이 됐을 리도 없는데 그때 상황은 김현규 의장이 정책의장이었습니다. 그런 결단을 아니내릴 방법이나 길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속으로 그랬어요. 김선배 덕에 국회의원 한번 해먹었는데 그거 도로 내놓으라고 그러면 내놓을 수밖에 더 있겠느냐, 그러고 그냥 그 자리에서 결정을 했고 주변에 사람들은 양김이 이끄는 민주원류에 합류했다고 이렇게 해몽을 해 줬습니다.

4.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네요. 사람들은 양김이 하니까 먼저 갔다, 당시에 거기 가면 죽는다, 이런 분위기였나요.

누구도 아마 믿지 않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민한당 제1야당을 버리고 양김 쪽으로 가는 거는 명백히 자살행위였습니다. 김현규의장하고 제가 결국 안기부에 잡혀갔습니다. 먼저 이제 김선배가 그날로 잡혀가고..

(탈당하고?)

네, 바로 그날입니다. 잡혀가고.

집에 들어갔는데 저는 통신이 오기를 김현규 의장이 잡혀갔으니까 다들 튀어라 그런 거였습니다. 근데 제가 이제 기자협회장을 할 때 이미 안기부 한번 다녀와서 아는 일이지만은 한사람만 잡아가지고는 종결이 안 되거든요. 반드시 하나가 더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내복 두==둑이 입고 돗바까지 준비를 하고 한두 군데, 도청하던 시절이니까, 내가 집에 있다는 걸 알릴 겸 전화를 하니 한 5분도 안 돼서 둘이 들어갔고, 2.12총선 돌풍이라고 그런 거에 발화점은 김현규 선배하고 저 두 사람이 안기부에 잡혀있었던 게 바로 발화점입니다. 그게 모든 유세에서 시민들 불 붙이는 말하자면 횃불이 됐습니다.

(선거 때 안에 있었나.)

저는 공고되던 날 해금이 되가지고 풀려나서 그 전엔 안기부 거기 있다가 나와서 집밖에 못나가도록 하는 일종의 가택연금. 선거기간이 17일이었습니다만은 그 공고 되던 날 풀려가지고 새벽에 마장동에 가서 버스타고 영주로, 제 선거구가 영주였으니까 내려갔습니다.

(김현규 의원이 그때 대단하셨는데..)

김현규 의장은 한국정치사에 몇 번 이렇게 크게 격랑을 일으키면서 방향을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만 여러군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 달라.)

2.12총선돌풍의 발화점을 마련한 것 역시 김현규 의장이었고, 아까 말씀드렸던 유신 이래 그때 뭐 5공 시절에는 거짓이 아니라 준위가 장관을 와라가라 이런 일도 있는 그런 정권하에서 방위비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와 가지고 마침내 관철을 해낸 것도 김현규 의장입니다.

5. 당시 2.12돌풍이 선거혁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양김의 위력이 그렇게 컸다 이렇게 말하는데...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장기간에 걸쳐서 사실은 목숨을 건 투쟁을 해왔으니까 도덕적인 우위에 있었고, 그런 도덕적인 우위를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킨 거는 김덕룡 의원이 짜낸 아주 탁월한 전략 덕분이었습니다. 김덕룡 의원이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6. 이민우 구상이 실제 내각제 개헌 바로 그 뒤에 홍사덕 의원이 있었다는 게,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그때 아닌가싶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설명하자면 그전에 있었던 몇 가지 일을 말씀드리는 게 편리할겁니다. 이민우 총재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정말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존경을 했고 지금의 거리에서 봐도 스케일 면에서는 당대 제일의 큰 스케일을 가진 그런 정치인이었습니다. 다만 양김씨가 가지고 있는 지지세력 그 위에 모셔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민우 총재님의 인기가 워낙 압도적으로 되가니까 처음에 올려모셨던 그 상황하고 국민들이 보이는 지지도하고 사이에 뭔가 좀 이상한 기미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때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기 위해서, 김영삼 당시 고문이었습니다만 김영삼 총재님이 직접 당을 지도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굳혔고, 그런 뜻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두 차례 전했는데도 이민우 총재님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해왔고 내가 직선제 개헌투쟁을 계속 두 분 모시고, 양김씨 모시고 해나가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로 그 무렵 김영삼 총재님이 독일방문을 했습니다. 저도 같이 당대변인이지만 김영삼 총재님 위상이 워낙 그러하니까 수행을 해서 갔는데 중간에 저한테 귀국해서 김대중 총재님을 만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김영삼 총재님은 지시를 할 적에 왜 그러는지, 미션이 뭔지를 절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하면은 “대변인 오늘은 늦었고 말야, 내일 저녁이라도 서울 들어가 봐”, 그래서 “예” 하니깐 “동교동은 들러야지”, “예”, 그게 이제 대화의 전부였습니다만 왜 가라 그랬는지는 내가 이제 새겨서 미션을 수행해야 될 저거였죠.

말씀대로 들어와 가지고 바로 동교동에 갔고, 김영삼 총재께서 직접 당을 지도하는 게 났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을 계속 듣고 있는 거 같습니다. 김영삼 총재 뜻을 전하는 게 아니라 주변 뜻을 전하는 형식으로 했고, 김대중 총재님도, 일제 때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의 대화방식은 조금 독특하거든요. “그러했는가” 반문하는 걸로 우리 대화는 끝났죠. 그 외에는 뭐 전혀 필요 없는 얘기 한참하다 나왔지만은, 그러고 바로 상계동에 이민우 총재님을 찾아가서 이제는 김영삼 총재가 직접 당을 지도할 의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김영삼 총재님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어요. 거기에 맞는 수순을 밟는 게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보인 반응은 그렇게 결정을 했으면, 대변인 판단이 그러면은 그렇게 해야지 라는 거랬어요.

근데 그 뒤에 찾아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거 아닙니까. 조금씩 바뀌고 그게 아마 크리스마스 무렵인데 늘 했던 대로 매일 아침 상계동에 올라가서 총재님이랑 그날 온 언론인들이랑 앉아가지고 이제 아침밥 같이 먹고 아침식사 끝난 다음에 내가 따로 커피 한잔 하면서 정세에 관한 그날 특히 말씀을 해야 될 부분이거나 그런 거를 선문답하듯이 한 5분, 10분 하거든요. 그날도 아주 통상적인 거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통상적이기 때문에 기자실에 와서 통상적인 얘기를 했고, 근데 내가 나온 다음, 기자들이 따로 총재님을 만나가지고 몇 가지 말씀을 들었고 그것 역시 늘 하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이 부분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로 다 끝났는데 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만 동교동쪽에서 아주 신임하던, 그리고 대단히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일보 기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하여튼 이민우 총재님이 늘 말씀하던 거를 다시 재정비해가지고, 거기에다가 방점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이 아니라 내각책임제도 고려할 수 있다는 쪽으로 해서 방점을 찍어가지고 내려왔어요. 그러고 기자실에서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되는게 아니냐 그러고 썼던 겁니다.

내가 겪은 부분만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말씀드리면 이민우 구상은 따로이 구상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민우 총재님이 당권을 양김한테 반환하는 일정을 만족스럽게 짜주지도 이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제기된 문제였고, 그 뒤의 일은 이미 보도로 다 알려졌습니다. 양김하고 이민우 총재님이 완전히 갈라서는 단계에 갔을 적에, 두 차례 갈라졌습니다. 첫 번째 갈라졌을 적에는 내 혼자서 싸웠죠. 이건 아니다 그래가지고 이민우 총재님하고 김영삼 총재님을 김덕룡 의원한테 상의해가지고 두 분이 만나면 해결이 될 거 아니냐, 그래서 구기동에 있는 두 분이 산행하고 내려올 적에 가끔 들러서 이제 식사하던 그 집에 모시고 한 30분 얘기하니까 깨끗이 끝났어요. 모든 게 이제 김영삼 총재님 원하는 대로 당권도 이렇게 이렇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내가 성공을 했는가 싶었는데 그러고 대변인을 관뒀으니까 매일 아침 올라가는 것도 끝나고 또 미국에서 초청받은 게 있어서 잠시 다녀왔더니 뭐 상계동 이민우 총재님 집 드나드는 사람들 구성이 완전히 달라져 있드만요. 그래서 구기동에서 양자회동에 합의되었던 게 깨지고 그게 이제 2차분열이죠. 그러고 그냥 끝난 거였어요.

7. 정당사책에 보니 12월 24일날 이민우 총재가 발표한 걸로 되어 있던데...

그거는 고인이 된 기자가 그렇게 재정리를 했고 아침마다 이민우 총재님이 상계동집에서 출입기자들하고 저랑 쭉 둘러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밥 먹으면서 하던 말씀 아주 드물게는 끝난 다음에 커피를 한잔 하면서 집에서 하던 말씀 그거의 되풀이였어요. 모든 게 되풀이였습니다. 다만 그 끝에다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직선제 개헌투쟁 이외에 내각책임제 개헌도 고려할 수 있는 거 같이 했는 건데 내각책임제라 그러는 거도 민주적인 정치양식의 하나다라는 이 얘기가 그렇게 전환이 된 거죠.

(그런 발언은 하셨군요)

이민우 총재님의 좋은 점이고, 제가 아까 스케일이라고 그랬습니다만 그런 소소한 일을 일일이 붙잡고 설명하신 적이 평생에 한 번도 없습니다. 나중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당권을 넘겨주는 시기선정에 대한 분쟁이랬는데 마치 이제 민주화투쟁에 걸림돌이 된 거 같이 됐으니까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죠? 한 일년 쯤 지난 다음인가 제가 이제 한번은 집에 있는데 이민우 총재님을 모시던 어떤 비서 중에 한사람이 전화를 해가지고 총재님이 그때 당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래도 회고하는 대담을 하면 어떻겠느냐, 어떤 월간지에 나가서, 그래서 깜짝 놀래가지고 쫓아올라갔어요. 아무개가 그런 얘기를 하던데 정말로 그런 검토를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때가 한참 이제 3김 그래쌓고 그럴 때에요. 말씀이 이제 이런거에요. 지금 야당을 이끌고 있는 게 양김인데, 양김한테 조금이라도 누가 될 얘기를 하는 거는 야당한테 누를 끼치는 일 아닌가,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이민우 총재님은 그런 분이었어요.

8. 그때 기록을 보니 공식기록은 없는데 당시 언론에서 대단했다, 모든 게 홍사덕 의원 작품이다.

사실이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그때의 핵심은 이민우 총재님이 당권을 그때 2월에 하느냐, 3월에 하느냐, 5월에 넘겨주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원하는 대로의 답변을 하고 또 그렇게 실행을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걸 놓치니까 그런 방식으로라도 강제를 했던 거고 이민우 총재님이 가지고 있던 실력으로는 그걸 막을 방법도 없었던 거고 그런 거죠.

(사람들이 그랬던 거 같다, 야당이 한편 투쟁하면서도 정권측하고 서로들 이야기가 있어서 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는데 전혀 아니다?)

그 당시에는 정부가 워낙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뭐 그렇게 목이 타가지고 야당을 회유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워낙 압도적이래서..

9. 87년도 신민당을 탈당해서 민주당으로 가게 됐는데 분열됐을 때 진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임에도 단일화를 못해내는 그 부분 때문에 탈당해서 그걸 촉구했는데 양김의 장풍에 살아남기 어렵다 이런...

단일화 의도를 했던 게 저 하나만이 아니고 또 여러 명이 됐습니다. 김대중 총재님이 소위 평화민주당 창당 결의를 밝히기 바로 전날 여기 맨하탄호텔, 지금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거기에 내가 한실 큰 거 두 개를 빌려가지고 어떤 경우에는 단일화하지 않으면 갈라선 야당에, 그러니까 양김이 갈라놓은 당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27명을 확보를 했습니다. 바로 전날이에요.

(현직의원 중에서요?)

예. 거기에는 박찬종 의원서부터 하여튼 조순형 선배도, 물론 조순형 선배가 아주 큰 기둥이었고 27명을 확보를 했는데 양쪽 방에, 숫자가 많으니까 양쪽 방에 나누어놓고 결의문을 만들어서, 미리 작성을 한거지만 서명을 받아갈라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한명, 두명씩 급한용무 또는 뭘 대고 빠져나가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결국 7명만 남았더랬습니다. 그 가운데 끝까지 남은 거는 5명 정도.

그렇게 해서 양김의 흡인력이라 그럴까, 그걸 당해내질 못하고 실패를 했고, 그 뒤의 일은 정국 전체흐름에서는 단일화운동했던 사람들이 워낙 뭐 사소한 부분으로 치이게 돼죠.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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