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 전문②입니다.
10. 오랜 재야생활 끝에 92년 첫 국회에 입성했는데 당시 국회의원이랄까, 정당정치 이런 것들 실제로 겪어보니 어땠던 걸로 기억하나.

내가 우선 그 꼬마민주당과 평민당을 통합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했죠. 그 통합협상을 해가는 과정이 나한테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어요. 아, 야당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리고 이 정당의 대표, 그땐 정당오너라고 그러잖아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택도 안 되는 독점권, 그건 어디서 나오느냐 지역주의에서 나옵니다. 그 YS나 DJ나 JP같은 사람들 완전히 지역영주들이거든요. 일본의 일종의 다이묘 같은 역할 했단 말이죠. 그 지역에서 입후보하는 사람들에 입후보하는 정치인들에 생사여탈권을 다 가지고 있어요.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건데. 서울수도권에서도 호남향우회 이 사람들의 지지 여부가 민주당 입후보자의 당락 여부를 결정하는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87년 대선결과를 보고 내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된다, 보스정치를 넘어서야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당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그 신념이 더 강해졌어요. 그러니까 이 정치적으로 망할 길만 택한 거지. 점점 거기 있으면서 반감이 심해지더라구요.

예를 들면 이런 적이 있었어요. 당무회의를 하는데 우린 재야에서 회의를 하면 상호비판도 하고 당연히 그 비판한 결과에 따라서 다 승복을 하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재야라는건 민주주의적 토론이라는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일 지경인데, 그런데 익숙했다가 정당판에 들어가니까 김대중 총재의 사전허락이 없으면 토론이 안 되는 거에요. 난 그런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어떤 주제를 놓고 그분의 의사하고 관계없이 난 토론을 하려고 했거든. 하루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주제를 꺼내니까, 토론주제를 꺼내니까 김대중 총재가 얼굴이, 낯색이 변하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가버리더라고. 당무회의 의장인데 당황할 수밖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그랬더니 나오는데 비서실 김옥두라는 사람 나를 패는 거야.

(패요?)

치는 거야. 총재님 의중도 물어보지 않고 말이지, 니가 부총재면 부총재, 최고위원이면 최고위원이지, 정당의 관행이 안 그렇다 이거야. 나하고 붙었어. 거기서. 야~ 이게 도대체 이게 정당이냐, 이게. 기자들이 막 몰려오고 그러니까 그놈이 내빼버리더라고. 그런 걸 겪을 때는 거의 절망이지, 절망.

또 한 가지 내가 예를 들게요. 국민회의 분당을 하기 직전에, 분당을 한다는 게 공식화 됐을 때 의원총회를 열어서 그 국민회의 분당파가 다 그리로 넘어가자라는 걸 붙여서 결정을 하려 그러는데 그게 되겠어요? 제정구 의원이 의총발언대에 나가서 자기는 김대중 총재를 존경하고 하지만 그분이 결정한 거 중에 이번에 그 분당결정이 일생일대에 가장 큰 실수다 이런 취지의 얘길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광주시장하는 박광태 이런 사람들이 짐승처럼 소릴 지르고 나가서 제정구 목을 졸라버리더라구. 의총장에서. 그래 뭐 겨우 뜯어말리고 그래서 죽진 않고 살았는데 그런 걸 겪게 되니까, 이건 정당이 아니다, 민주정당이 될 수가 없구나, 이걸 그 속에서 겪으면서 겪을수록 그쪽에 순치되어가질 못하고 순치되어가야 이제 나중에 총리도 하고 장관도 하고 그러는 건데, 우린 그걸 못하겠더라고. 나나 제정구도. 결국 그걸 다 아주 격렬히 그런 걸 겪은 사람들일수록 같이 갈 수가 없었던 거에요.

통합민주당과 국민회의 분당, 그리고 국민통합추진회의 통추 분해과정 이런 거에 대해서 또 좀 얘길 마저 하지. 지금 얘기 끝이 그건데.

김대중 총재가 이제 92년에 대선 패배하고 영국으로 갔잖아요. 일종에 일시적인 정치망명이지. 난 그렇게 봐요. 71년 대선, 87년 대선, 92년 대선, 이 세 차례 대선에서 졌잖아요.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기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됐을 거에요. 그게 아마 첫 번째 이유일거라고.

두 번째는 자기의 동지이기도 하지만 최대의 정적인 YS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정치보복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갖게 됐을 거에요. 그걸 일단은 좀 피해봐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을 거라고 봐요.

이제 그런 점에서 정계은퇴선언을 하고 영국에 체류를 하게 됐는데, 김대중 총재의 그 정계은퇴, 영국체류 이런 거는 충분히 계산된 선택이었다고 나는 봐요. 그 DJ의 정계은퇴 그것이 민주당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겠냐고. 지도부 공백상태를 불러오는 거에요. 완전히 DJ사유물 같은 정당이었는데 민주당이 혼란스러워지고, 민주당에 야당존재감이 약화되고, 리더십이 부재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어떤 결과가 왔을까요?

YS와 민자당의 오만으로 이어졌다고.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은 그 YS와 민자당의 오만, 그리고 민주당의 혼란과 리더십 부재, 이건 역설적으로 무슨 상황을 조성하겠어요? DJ의 복귀조건을 만드는 거에요. 충분히 계산된 행보라고. 그런 점에선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지
.
그리고 그때 DJ가 물러나면서 동교동계에서는 이기택 후계구도를 밀었어요. 이기택을 대표최고위원을 만들었다고. 동교동계가 밀어서. 그거는 DJ 이후에 후계자가 되려는 김상현, 정대철 등의 등장을 막으면서 이기택 후계체계를 만들어서 이 호남세력이 주축을 이루는데서 이기택이 계속 지도체제가 될 수 있겠어요? 그거 안 되는 거 아니에요? DJ 지지세력이 이기택 후계구도를 끝까지 받아들이겠냐고? 이기택 후속체제라는 것은 김상현, 정대철의 등장을 막는 임시방편이었다고.

결국 94년 후반에 DJ가 귀국을 하면서 바로 아태재단을 만들죠. 아태재단을 만들면서 민주당에 있는 DJ세력은 그리 다 집결하는 거에요. 그리고 나온 게 지역등권론이죠. 지역등권론이라는 거는 호남지역차별을 배격한다는 논의 아니에요? 그건 또 달리 말하면 호남지지세력의 결집을 공식화 한다는 얘기라고. 즉, 지역등권론을 통해서 아태재단이라는 기구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의 모태노릇을 한 거죠. 그 논리는 지역등권론이었고.

그 결과 이제 이 1995년에 민주당은 무력화되기 시작했어요. 15대 총선, 그러니까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었어요. 제1야당으로 부상을 하고, 잔류민주당은 16석을 얻는다고. 근데 이렇게 분당이 됐으면서도 16석과 79석을 합치면 몇석이요?

(95석..)

먼저 번에 민주당 의석보다 한 석이 더 많은 편이에요. 그때 94석이었으니까. 만약에 이게 분당이 되지 않고, 그대로 선거를 치렀다면 제1당이 됐을 가능성도 있는 거라고. 멀쩡한 통합민주당을 자기 정계복귀, 정계은퇴했다 정계복귀하느라고 이 당을 이렇게 멍들여 놨다고.

그러나 분당을 했어도 국민회의가 제1당이 되 버렸다고. 이때 꼬마민주당이 다시 되 버린 거죠. 이기택에 꼬마민주당은 이기택계와 김원기 주축으로 한 통추세력으로 양립이 되는 거죠.

그런데 97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통추세력은 다시 자기들이 반대했던 통합을 반대했던 새정치국민회의 쪽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해요. 97년 그 중반이후에는 언제 통합되느냐, 새정치국민회의 쪽으로 언제 합류하느냐 그것만 남았지 거의 들어가도록 이제 들어가도록 되 있었죠. 그런데 그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가기를 반대하는 내나 제정구나 박계동 뭐 이런 사람들과 김원웅까지, 이철까지. 이 세력은 조순 씨가 민주당의 총재가 되면서 조순 씨가 이회창씨하고 접촉을 하면서 민주당과 신한국당을 통합시켜 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통추를 통해서 새정치국민회의에 가지 않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냥 자동적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하게 돼 있었어요.

지금도 내가 그때 회한으로 남는 게, 그때 정치를 내 고만뒀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랬어야 옳다고 봐요. 근데 DJP연합보다는 DJ하고 JP가 연합을 해 DJP연합을 만들었잖아요? 통추도 거기 합류해버리고. 통추도 사실은 DJP연합에 합류한 셈 아니냐고. 참 그 명분이 없는 일 아니요? 자기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 투항을 해버린 꼴이 되지 않았어요?

나는 그때 보기에 이회창-조순 연합이 DJP연합보다는 도덕적으로나 지역주의라는 측면에서나 하자가 덜 하다고 봤어요. 물론 그 뒤에 이회창씨가 대통령선거에 패배하고 그러면서 이전에 TK 민정계에 둘러싸이면서 점차 극우화, 보수화의 길을 걸었죠. 97년 대선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회창씨가 그렇게 극우화,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상당히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어요. 조순 씨하고 함께. 그렇게 그때는 오히려 DJP연합이 지역주의 연합이고 전라도와 충청도연합이라고 전충연합이라고 그랬었지. 그때.

(호충연합?)

호충연합인가 뭐, 얼마나 그 좀 이상했냐고. 통추라는 게 국민통합추진이라는 게 그리로 투항을 해버렸으니까. 그런데 대선에 승리를 하고 나니까 모든 게 다 합리화가 되어 버리더라구. 결과적으론 승자중심으로 역사는 다시 쓰여지는 거죠. 근데 또 시간이 지나면 또 그걸 반추해보는 거니까.

이제 이걸 정리를 하면은 이 통합민주당의 분해, 통합민주당 세력의 분해는 3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보고자 했던 그 새로운 정치세력의 정치실험이 실패했다는 걸 드러낸,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이 무산돼 버렸다는 걸 뜻하는 거에요. 그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11. 당시 국민회의로 탈당해나가지 않고 있는 분들이 김원기, 이기택으로 나뉘어졌었는데 당대표 경선에서 의장님이 이기택 대표를 미는 바람에...

아니, 난 밀지도 않았어.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이기택계가 됐다, 그래서 통추사람들이 이부영 의장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그거는 자기들이 결국 나중에 국민회의로 가는데 명분을 찾은 측면도 있는데, 사실은 그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기택과 대결을 해야 된다고 그랬었어요. 근데 일부 이제 그 통추세력이 홍성우 씨를 이렇게 자꾸 부추겼어요. 안될 일인데. 그때 통합민주당 여기 남은 사람들이 홍성우 변호사를 어떻게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 분 자신도 자꾸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굉장히 망설이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홍성우 변호사하고 나하고의 관계는 그분이 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할 수가 없는 입장이라고. 오랜 세월에 걸쳐서 나를 변호를 했고. 그런데 그분은 정치초년병 아니에요? 근데 그분이 나중에 망설이다가 나오는 바람에 그냥 이기택 씨가 먹어버린 거지. 근데 이기택 씨를 그때 당대표로 해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고. 그렇다고 홍성우 씨가 나가서 그걸 해서 정말 대표가 된들, 난 그 김원기씨가 그런 점에서 좀 솔직했어야 된다고 봐요. 자기가 나올라면 나와야지. 통추세력을 대표해서.

근데 그렇게 결정을 못 내리고 홍성우 씨를 내보낸 건 그냥 이기택 씨한테 대표를 넘겨주겠다는 뜻밖에 안 됐어요. 싸움이 될라고 그랬으면 내가 나가든지, 그래야 되는 건데 나는 그때 통추 쪽으로 해서 간 사람들이 대단히, 그건 참 뭐랄까 새로운 정치세력을 남아있는 민주당을 통해서 시도해보는 실험을 포기한 거라고 난 봐요.

(그때 통추에 참여 안 하셨죠?)

통추에 참여를, 나를 배제를 했지. 그 사람들이.

12. 당시 통추는 여러 가지 구상을 가졌던 거 같다. 듣기론 이수성 총리와 김원기 대표가 동기라고 그러던데...

모르겠어요. 이수성씨는. 이제 DJ쪽하고도 계속 교류를 했었고 이수인 의원이 그 전에 서경원 의원 영광함평에 나가서 국회의원도 되고 그랬잖아요? 그런 관계가 있어서 교류가 잦고 그랬는데 이수성총리가 우리는 사실 아까 내가 얘기한대로 이회창씨를 좀 끌어들이려고 그랬고, 작은민주당의 후보로 끌어들일려고 그랬고, 김원기씨는 이수성씨를 생각했었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수성씨 끌어들이는 건 우리한테 계속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었다고. 우린 알곤 있었는데.

그러면 국민회의 쪽이 저렇게 세력을 넓혀가고 민주당을 분해시키려고 시도를 하는데 무언가 빨리 결단을 냈어야 된다고. 뭐 이회창을 끌어들이든지, 이수성을 끌어들여서 머리로 세우든지 그걸 안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기택은 이기택대로 작은민주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자기가 대표가 되려 그러고. 그렇게 되면 이건 통추 쪽은 떨어져나가게 생기고 홍성호라도 세우겠다고 그러면 해봐라 그러나? 그거는 이기택이한테 지는 카드다, 이렇게 돼 있었다고. 그럼 아니면 나를 못세우겠으면 자기라도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이수성이라도 끌어다가 세우던지, 그걸 안 하는 거야. 차일피일하고. 그러다 이기택으로 넘어가니까 통추는 새정치국민회의 쪽으로 그냥 가버리고. 이리 된 거 아니에요.

뒤에 생각을 해보면은 그때 내가 정치를 아예 그만두고 언론인으로 복귀를 하든지 시민운동으로 나서든지 그랬었던게 제1안이고, 아니면 그냥 이쪽저쪽 선택 안하고 정치를 쉬든지 그랬어야 되는 게 아니냐. 하여튼 김대중 총재 정계복귀하는 바람에 그 중간에 있던 새로운 정치세력이 다 분해가 되어버린 거에요.

13. 당시 96년도 남아있던 통합민주당이 15대 총선 치르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고, 이것이 그 이후에 새로운 정당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어렵다. 결과론적으로 돼서 새정치운동이 소멸된 게 아닌가.

아까도 내가 얘기했지만 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이 무산된 거에요. 그러면 이제 뭐 새정치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라는 97년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찢어밟기려는, 어느 정치세력도 중간지대에 남겨놓지 않으려는. 그래서 이 결전을 치르는 거 아니에요? 여기 어떤 새로운 정치세력이 남아서 양쪽을 다 지역주의 내지 기득권세력이라고 공격을 하고 훨씬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개혁적 이미지나 아젠다를 가지고 정치 치르면 양쪽세력이 다 못 견디겠는 거 아니오? 그래서 이걸 분해시키려 그런 건데 왜 너희들이 분해 안 되고, 거기 못 남아있었냐고 추궁을 한다면 한말은 없지만 그 DJP연합을 통추가 선택을 해서 갔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냐고. 나처럼 재야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진보성향의 정치인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가 있냐고. 그런데 DJP연합을 선택해간 통추는 정당했고, 한나라당을 선택해간 이부영은 잘못됐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겠냐고.

결과적으로 나는 한나라당에서도 못 견뎌가지고 또 나올 수밖에 없었고, 또 DJ의 민주당이 지역주의적이고 보스정치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거기서 떨어져 나온 후에 열린우리당이 된 그 세력이 또 다시 만난거야, 열린우리당으로. 그러나 이 정치실험도 또 실패했어요. 앞으로 내 이 정치실험 실패한 거 뒤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에요.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정리 :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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