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총선과 대선, DJ의 정계은퇴와 복귀에 따른 민주세력의 혼란과 정계개편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폴리뉴스> 창간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에 대단한 열정과 성의를 보여줬다.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이끌었던 그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더불어 군사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를 주도했던 ‘재야 3인방’ 중 한 명이다.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부총재, 통합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부총재, 열린우리당 의장까지 각 정당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한국정치사의 주역이자 한국정당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월22일 광화문에 위치한 이 전 의장 사무실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특히 이 전 의장은 “지난날 과거를 올바로 조명해야 미래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며 <폴리뉴스> 특별기획 취지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 스스로 ‘오래된 미래’라 규정하는 한국정치사에 관한 기록을 두꺼운 대학노트 1권 가득히 정리한 채 인터뷰에 응하는 열과 성의를 보여줬다.

그는 또 비록 익숙지 못한 타자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며칠에 걸쳐 직접 작성한 생생한 증언을 참고자료로 취재진에게 보내오면서 “사초의 중요성에 입각해 기술했다”고 밝혔다.

지면을 빌어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취재진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눠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동아투위와 당시 시대적 배경, 87년 6월 항쟁과 양김 분열, 87년 체제의 특성, 3당 합당과 재야민주세력의 대응 등에 관한 그의 생생한 증언과 진솔한 입장을 ②편에서는 92년 총선과 대선, DJ의 정계은퇴와 복귀에 따른 민주세력의 혼란과 정계개편 등에 관한 숨겨진 얘기와 정치적 의미에 대해 ③편에서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양대 세력 내에서 이 전 의장이 겪었던 남모를 고통, 4대개혁입법 좌초 과정 등 열린우리당 창당부터 해체까지 숨은 비화와 함께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에 대해 전할 계획이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② 동영상 및 전문


*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이부영①’ 편에 이어

92년 총선 통해 제도 정치권으로. “3김은 일본의 다이묘 같은 지역영주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동아투위로 시작된 오랜 재야생활 끝에 92년 14대 총선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서 당선, 여의도 정치권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1990년 초,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정당의 주도 하에 민정당-민주당-공화당 3당이 합당,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자, 재야민주세력은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 창당론’으로 나뉘어 여권발 초대형 정계개편 태풍에 대응코자 했다.

이부영 전 의장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더불어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주도했던 ‘재야 3인방’ 중 한 명이다. ⓒ폴리뉴스
이 때 이 전 의장은 야권통합론의 기치를 내걸고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을 통합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로써 통합야당인 ‘통합민주당’이 탄생하게 됐다.

그러나 오랜 재야투쟁의 경험이 체화됐던 이 전 의장에게 기존 제도 정치권의 관행은 이해 못할 ‘벽’이자 넘지 못할 ‘산’이었다.

이 전 의장은 “꼬마민주당과 평민당 간 통합 협상을 진행하면서 ‘아, 야당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고 소회했다.

그는 “정당 대표, 즉 정당오너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권, 이것은 지역주의에서 나온다”며 “YS, DJ, JP(三金)는 일종의 일본의 다이묘(大名, 봉건영주) 같은 지역영주들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해당 지역 내에서)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이기 때문에 (3김은) 그 지역에서 입후보하는 정치인들에게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며 지역을 기반으로 한 3김정치의 위력에 대해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87년 대선 결과를 보고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된다, 보스정치를 넘어서야 된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정당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그 신념이 더 강해졌다. 반감도 심해졌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제도권 정당에서 관행처럼 뿌리내린 보스정치의 구체적 실례까지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정당판에 들어가니까 김대중 총재의 사전 허락이 없으면 토론이 안 되는 거예요. 난 그런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토론주제를 꺼내니까 김대중 총재가 낯빛이 변하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가버리더라고. (당시 내가) 당무회의 의장인데 당황할 수밖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그랬더니 나오는데 비서실 김옥두라는 사람이 나를 치는 거야. ‘총재님 의중도 물어보지 않고 말이지, 니가 부총재면 부총재, 최고위원이면 최고위원이지, 정당의 관행이 안 그렇다’ 이거지. 도대체 이게 정당이냐, 이게. 그런 걸 겪을 때는 거의 절망이지, 절망.”

“또 한 가지 내가 예를 들게요. 국민회의 분당을 하기 직전, 의원총회를 열어서 국민회의 분당파가 그리(국민회의)로 넘어가자는 걸 결정하려 그러는데, 故 제정구 의원이 의총 발언대에 나가서 ‘김대중 총재를 존경하지만 그 분이 결정한 것 중에 이번 분당 결정이 일생일대에 가장 큰 실수다’ 이런 취지의 얘길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광주시장하는 박광태, 이런 사람들이 짐승처럼 소릴 지르고 나가서 제정구 의원 목을 졸라버리더라고. 의총장에서. 그래 뭐 겨우 뜯어말리고. 그런 걸 겪게 되니까, 이건 정당이 아니다, 민주정당이 될 수가 없구나, 이걸 그 속에서 겪으면서 겪을수록 그쪽에 순치되어가질 못하고. 나나 제정구도. 결국 그걸 다 아주 격렬히 겪은 사람들일수록 같이 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92년 대선, 그리고 DJ의 계산된 정계은퇴 “이기택 후계체제는 김상현, 정대철의 등장을 막는 임시방편”

92년 총선에 이어 그해 겨울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최종투표 결과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997만 표, 41.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804만 표로 33.4%, 국민당 정주영 후보 388만 표로 16.1%, 신정당 박찬종 후보 151만 표로 6.3% 득표를 획득했다.

‘이선실간첩단사건’ 등 공안사건을 통한 DJ에 대한 색깔론 제기 및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특히 영남 패권주의 열풍이 92년 대선판을 결정지었다.

이 전 의장은 1989년 1월21일, 재야민족민주운동의 전국조직 ‘전민련’의 상임의장에 취임했다. 사진은 ‘전민련’ 창립대회 취임 연설 장면.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김대중 총재가 92년에 대선 패배하고 영국으로 갔는데, 그것은 일시적 정치망명”이었다고 DJ 정계은퇴를 해석했다.

이 전 의장은 그 근거로 “71년, 87년, 92년 세 차례의 대선에서 DJ가 졌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동지이자 최대 정적인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치보복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갖게 돼 일단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전 의장은 “김대중 총재의 정계은퇴, 이것은 충분히 계산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DJ의 정계은퇴는 민주당의 혼란과 리더십 부재를 초래해 야당으로서의 무력화를 불러왔고, 동시에 YS와 민자당의 오만으로 이어졌다”며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DJ의 복귀 조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DJ가 물러나면서 동교동계에서는 이기택 후계구도를 밀었다”며 “DJ 이후 후계자가 되려는 김상현, 정대철 등의 등장을 막으면서 이기택 후계체계를 만든 것인데, 호남세력이 주축을 이루는 당에서 이기택 지도체제가 계속 될 수 있었겠냐. 그건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의장은 “이기택 후계체제라는 것은 김상현, 정대철의 등장을 막는 임시방편이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DJ의 정계은퇴가 여러 정치적 상황과 앞으로의 정세 변화를 염두에 둔 ‘계산된 행보’라는 것이다.

이 전 의장은 “결국 94년 후반, DJ가 귀국을 하면서 바로 아태재단을 만들었다”며 “아태재단을 만들면서 민주당에 있는 DJ세력은 그리 다 집결하고 지역등권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지역등권론에 대해 “호남지역 차별을 배격한다는 논리로, 달리 말하면 호남지지세력의 결집을 공식화 한다는 얘기”라며 “지역등권론 논리를 통해 아태재단이라는 기구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의 모태 노릇을 했다”고 밝혔다.

“통합민주당의 분해는 3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고자 했던 정치실험의 실패”

이부영 전 의장은 격동의 한국정치사 변곡점마다 주요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국정당사의 ‘산 증인’이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그 결과 통합민주당은 무력화되기 시작했다”며 “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잔류 민주당은 15석을 얻었다”고 말했다.

1996년 4월11일 치러진 제15대 총선 결과, 신한국당이 139석,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 통합민주당 15석, 무소속은 16석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전 의장은 “만약 (통합민주당이) 분당되지 않고, 그대로 선거를 치렀다면 제1당이 됐을 수도 있었다”며 “멀쩡한 통합민주당을 (DJ) 자기 정계복귀한다고 멍 들여 놨다”고 비판했다.

이 전 의장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꼬마민주당은 이기택계와 김원기를 주축으로 한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세력, 이렇게 두 세력으로 양립했다”며 “97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통추 세력은 자신들이 반대했던 새정치국민회의 쪽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이어 “97년 중반 이후에는 언제 통합되느냐, 새정치국민회의 쪽으로 언제 합류하느냐 그것만 남았지, 거의 들어가도록 돼 있었다”며 “제정구, 박계동, 김원웅, 이철, 그리고 나처럼 새정치국민회의 합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조순 씨가 민주당 총재가 된 이후 이회창 씨하고 접촉하면서 민주당과 신한국당을 통합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냥 자동적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하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지금도 회한으로 남는 게, 그때 정치를 그만뒀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고백한 뒤, “통추가 DJP연합에 합류한 것은 자신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 투항해버린 꼴”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전 의장은 “이회창-조순 연합이 DJP연합보다는 도덕적으로나 지역주의라는 측면에서나 덜 하자가 있다고 봤다”며 “97년 대선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회창 씨가 그렇게 극우화, 보수적이지 않고 상당히 개혁적 측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IMAGE4이 전 의장은 “대선에 승리를 하고 나니 통추가 자신들이 반대했던 DJP 연합으로 투항을 한 것이 모든 게 다 합리화가 되어 버렸다”며 “결과적으로 승자 중심으로 역사는 다시 쓰여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전 의장은 이어 “나처럼 재야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진보성향의 정치인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고, 통추가 자신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DJP연합을 선택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냐”며 “그런데 DJP연합을 선택한 통추는 정당했고, 한나라당을 선택한 이부영을 잘못됐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의장은 “이걸 정리하자면 통합민주당의 분해는 3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보고자 했던 그 새로운 정치세력의 실험이 실패했다는 걸 드러낸,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이 무산돼 버렸다는 걸 뜻한다”고 규정했다.

“김원기의 통추, 이기택에게 대표 넘겨줘... 그 점에서 김원기 씨 솔직해져야”

이 전 의장은 “국민회의가 세력을 넓혀가고 민주당을 분해시키려고 시도하는데 이회창을 끌어들이던지, 이수성을 끌어들여 머리로 세우든지, 무언가 빨리 결단을 내렸어야 되는 상황이었다”며 “그런데 이기택은 이기택대로 꼬마민주당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표가 되려 하고, 그렇게 되면 통추 쪽은 떨어져 나가는데. 통추는 홍성우를 세우겠다고 하는데 그건 이기택에게 지는 카드였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김원기, 이기택계로 나뉜 꼬마민주당 구도에 대해 “당 대표 경선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기택과 대결해야 된다고 했다”며 “그런데 일부 통추세력이 홍성우 변호사를 자꾸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이어 “오랜 세월에 걸쳐 나를 변호한 홍성우 변호사가 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며 “결국 그 분이 망설임 끝에 (당 대표 경선에) 나오는 바람에 그냥 이기택 씨가 (당권을) 먹어버렸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꼬마민주당의 해체 관련해 “통추가 이기택 씨에게 대표를 넘겨준 점에 대해 김원기 씨가 솔직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리뉴스
그러면서 이 전 의장은 “이기택 씨가 당 대표를 해서는 (꼬마민주당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며 “정치초년병인 홍성우 씨가 나가서 정말 대표가 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장은 “김원기 씨가 그런 점에서 솔직했어야 된다”며 “통추세력을 대표해서 본인이 나오려면 나와야지, 홍성우 씨를 내보낸 건 그냥 이기택 씨한테 대표를 넘겨주겠다는 뜻밖에 안 됐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장은 “나를 세우지도 않고, 김원기 본인이 나오지도 않고, 이수성이라도 끌어다 세우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당권이) 이기택으로 넘어가가니까 통추는 새정치국민회의로 그냥 가 버렸다”고 당시 상황을 요약했다.

이어 그는 “통추 쪽 사람들이 남아있는 민주당을 통해서 새로운 정치실험을 시도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라며 “통추는 나의 참여도 배제했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하여튼 김대중 총재 정계복귀하면서 그 중간에 있던 새로운 정치세력이 다 분해됐고, 이는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의 무산을 의미한다”고 정리했다.

이 전 의장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새정치국민회의는 결전을 치르기 위해 그 어떤 정치세력도 중간지대에 남겨놓지 않으려 했다”며 “새로운 정치세력이 남아서 양쪽을 다 지역주의 내지 기득권 세력이라고 공격하고, 국민들에게 개혁적 이미지와 아젠다를 가지고 다가가면 양쪽 세력이 다 못 견디겠다는 것. 그래서 이걸(민주당을) 분해시키려 한 것”이라고 민주당 분해과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결과적으로 나는 한나라당에서도 못 견뎌서 또 나올 수밖에 없었고, 또 DJ의 민주당이 지역주의적이고 보스정치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떨어져 나온 세력들이 열린우리당으로 다시 만났다”며 “그러나 이 정치실험도 또 실패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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