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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폴리뉴스> 창간9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한국정당실록 60년] 관련해, 며칠에 걸쳐 손으로 직접 타이핑해 보내준 원고 전문이다.

이 원고는 지난 1월22일 <폴리뉴스>와의 인터뷰 후 보강내용으로 보내온 것임을 밝힌다.

이 전 의장의 열정과 성의에 취재진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1. 동아일보 기자시절 박정희-DJ-YS의 정치에 대한 인상

61년 대학입학 두 달 만에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다. 두 달 남짓이었지만 4.19 민주혁명의 마지막 세례를 받았다. 6.3사태 이후 베트남 파병, 외자도 입에 따른 경제개발이 있었지만 그것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특히 부정부패, 정경유착, 정보정치, 삼선개헌, 유신독재는 박정희에 대한 선입견을 벗겨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DJ와 YS의 71년 대통령 후보경선과 DJ의 71년 대선의 선전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DJ가 73년 도꾜납치사건 이후 재야세력과 벌인 유신체제에 대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제도권 야당과 재야세력을 잇는 연결고리로서 제도와 운동을 묵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유신 말기까지 제도권 야당의 지도부로서 역할을 다한 YS의 존재도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주요거점이었다. DJ와 YS의 그런 비중은 바로 釜馬민주항쟁과 10.26 박정희 피살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으로 입증되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언론인으로서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하면서 본 한국정치는 만주화의 열정과 강고한 독재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기세로, 미국 흑인 시인 엘드리지 클리버의 표현을 빌면 Soul on Ice 처럼 부닥치고 있었다. 그 Soul이 DJ-YS, 그리고 그 Ice 가 박정희였다고 할 수 있겠다.

2. 1990년대 초반 꼬마 민주당 및 통합민주당의 창당과정

이 문항에 대한 답변은 80년대의 사전 설명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박정희피살 이후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이미 DJ와 YS는 분열의 조짐을 보임으로써 전두환 신군부의 탈권에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전두환 일당은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DJ YS를 정치에서 추방했다. 민주화운동세력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87년 6월 민주대항쟁을 거쳐 전두환의 철권통치를 끝내는데 성공하고 민주화의 대단원을 맞이하는 듯 했다.

나는 87년 대선 당시 김천교도소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봤다. 87년 대선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1)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뤄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YS-DJ 진영으로 분열했다.
2)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 세력의 주요 보루인 영남에서 민주
개혁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3) 70, 80년대 동안 제도 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오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되었다.
4) 군부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졌고 냉전시대의 해빙으로 한국
정치에서 이념대립지형이 신속히 완화되었다.

80년의 광주학살이 있은 후, 81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던 나는 88년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다시 세 번째로 풀려났다. 당시 많은 국민들이 그랬듯이 나는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DJ-YS의 적전 분열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이 적전 분열을 해방 후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이승만의 결정에 비유한 김상현의 견해는 탁월하다. 한국 사회의 질적 변혁의 기회를 상실케 한 점에서는 두 경우가 같다고 본 것이다. 87년 대선에서 DJ-YS-재야의 연합민주세력이 집권했을 경우, 해방 후, 4.19혁명 후 이루지 못하고 유예되어왔던 민주주의 개혁과 남북관계개선이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을 것이다.

87년 대선 패배 뒤에 학계 언론계 지식인 사회에서 그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평가 없었던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대선 이후에도 전혀 반성 없이 정계의 강자로 군림하던 YS DJ에게 위압당했거나 그들도 함께 분열의 당사자들이어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88년 혹한의 3월초 분신자살한 어느 학생의 장례식장에서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갓 풀려난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DJ-YS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당신들은 이 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 반성하고 있지 않는가, 무슨 염치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추궁했다. 그때 추위와 분노로 일그러졌던 두 사람의 눈초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아마 그때 나의 정치적 운명은 정해졌을는지 모른다.

1990년 초에 나는 다섯 번째 투옥생활을 끝냈다. 그러나 내가 석방되기 직전 노태우-YS-JP의 3당 합당으로 거대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생겨났다. 야당은 DJ의 평민당과,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은 이기택의 꼬마민주당으로 왜소화되었으며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은 87년대선의 후유증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재야세력은 거대 여당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일 대오의 야당이 필요하다는 야당 통합론과, 중요한 때 분열을 일삼아 독재계승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제도권 야당은 기대할 것이 없으니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해야한다는 민중정당 창당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안 통치를 다시 시도하려는 거대 민자당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통합야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87년의 배신''의 기억은 현실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야인사들을 망설이게 만들었고 괴롭혔다.

우선 통합에 앞서 非호남당인 이기택의 작은 민주당이 약체이어서 재야민주세력이 결합해 규모를 키워서 호남당으로 간주되던 평민당과 통합해야 야권을 호남세력으로 평가절하 하려는 민자당 여권의 음모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재야세력이 이기택 민주당에 결합하고 이어서 평민당과 합당하는 수순을 밟아 통합민주당을 만들어냈다. 여러 과정이 있었으나 민주당 쪽의 나와 평민당 쪽의 한광옥이 협상을 통해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에 김대중을 법적 대표로 등록하자는 안으로 합의했다. 이 협상은 나에게는 제도권 야당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통합민주당은 92년 총선에서는 야권통합의 효과를 톡톡히 거뒀으나 같은 해 대선에서는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패배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3. 통합민주당으로부터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및 국민통합추진회의 분열과정

대선패배와 DJ의 정계은퇴는 통합민주당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DJ없는 민주당, DJ없는 호남민심은 사공 잃은 나룻배와 같았다. 71년, 87년, 92년 세 차례 대선에서 낙선한 DJ로서는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양김 분열에 따른 패배와 민주세력의 분열, 그리고 잇따른 92년 패배는 DJ로 하여금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동지이자 정적인 YS의 승리로 DJ에 대한 정치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DJ의 후퇴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정계은퇴 선언과 영국체류의 방안이 나왔다. 그것은 일시적 정치망명이었다.

그러나 DJ의 정계은퇴는 민주당의 혼란, 야당의 존재감 약화와 리더십 부재로 이어졌고 YS와 민자당의 오만을 불러왔다. 역설적으로 DJ의 복귀조건을 더욱 강화하는 꼴이었다. 호남세력이 압도적인 민주당에서 DJ의 동교동계는 역설적으로 이기택 대표 체제를 유지시켰다.

DJ의 후계구도를 이기택으로 정한다는 것은 DJ지지 세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택 지도체제는 DJ없는 야당 차기지도자를 꿈꾸던 김상현 정대철 등의 부상을 억제하는 임시체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한 DJ는 민주당 분당의 수순을 밟아갔다. 95년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아
태재단)을 설립하고 지지 세력의 결집을 시작한 DJ는 지역등권론(호남지역 차별을 배격하는,
달리 말하면 호남지지세력의 결집을 공식화하는)을 내세우면서 민주당을 분당시켰다. 95년에 분당된 민주당은 무력화되었고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골수 DJ세력만으로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국민회의는 빠른 속도로 민주당을 분해시켰다. 15대 총선에서 지역구 비례대표 합쳐 16석을 얻은 민주당은 이기택계와 통추세력으로 양분되었지만 김원기를 중심으로 하는 통추세력은 97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국민회의 쪽으로 기울어갔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안에는 정권교체론(국민회의 합류론)과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론
(국민회의 합류거부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수파를 형성한 국민회의 합류파는 김원기 노무현을 주축으로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나와 제정구 이철 박계동 김원웅 등 소수파인 삼김정치 지역주의 극복론자들은 97년 대선에 임박해서 선택을 강요당하다가 마지막 순간 DJP연합 보다는 이회창-조순 연합이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의 대의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체인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이로써 삼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 보고자했던 통합민주당과 국민통합추진회의의 정치실험은 분해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자리를 빌려 조그만 에피소드를 밝히고 가야할 것 같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과정이 왜곡되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통합민주당은 새정치국민회의가 분당하고 15대 총선에서 불과 16석을 얻은 가운데 일부 당선자가 총선 직후 신한국당으로 이적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96년 5월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갖추려 시도했다. 총선에서 낙선한 이기택이 다시 총재로 등장할 태세였다. 그럴 경우 민주당의 미래는 암담해진다는 것이 반이기택진영의 판단이었다. 반이기택 진영에서는 대항마를 내세워야 했지만 쉽사리 합의가 이뤄질 수 없었다. 이 진영의 지도자인 김원기는 총선에서 낙선한 처지여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여러 인사들이 서울의 유일한 당선자였던 나에게 나서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뒤에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구성하게 되는 세력은 나의 경선출마를 적극 견제하고 나섰다. 그들은 15대 총선직전 개혁신당을 통해 민주당에 합류했다가 낙선한 홍성우변호사를 후보로 내세우려했다.

통합민주당의 창당 주역 중의 한사람인 나는 전국의 대의원들에게 지명도를 갖고 있어서 이기택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있다는 여론조사도 나와 있었다. 현역의원도 아니고 대의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홍 변호사를 내세워서는 이기택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이 민주당 안의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나를 견제하려는 세력의 의도는 알 수 있을듯했다. 홍성우변호사가 경선에 나설 뜻을 확고히 가질 경우, 홍 변호사와 막역한 관계를 가진 내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기택을 꺾고 당 총재가 되어 대선에 입후보할 경우 자금도 없고 당선도 안 될 후보와 고달픈 정치를 해야 할 것도 그들이 나의 당 지도부 경선을 방해한 이유이기도 했고, 이해할만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14대 총선에 초선으로 진입한 이후에 계속 공표된 차기 지도자 1위라는 여러 언론매체의 여론조사들도 동료정치인들의 시기를 불러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망설이던 홍 변호사가 총재경선에 나서는 것으로 결정하자 그들이 바라던 대로 나는 총재경선에 나서지 않았고 이기택은 총재에 당선됐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들의 비방 중상이 은밀히 유포되었다. 그들은 내가 홍 변호사를 지지하지 않고 이기택을 지지해서 홍 변호사가 패배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오늘까지도 그 비방 모략은 은밀히 유지되고 있다. 반이기택 세력은 즉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구성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개시했다. 민주당의 침몰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다. 그들은 통추를 구성하면서 나를 배제했다. 조만간 국민회의 합류를 예정하고 있었던 통추가 제3의 노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DJP연합에 강력히 반발하던 나를 구성원에서 배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 오랜 세월 회한으로 남는 일은 이 때 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정계은퇴를 하고 시민운동에 전념했거나, 내부 충전을 위해 뒤늦게나마 공부를 더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했던 동료 후배들을 내버려둔 채 나 홀로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나의 입장이기도 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딱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볼 따름이지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도리이겠다.

4. 한나라당 입당과 이회창 지지 과정, 그리고 원내총무 부총재 등장 과정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DJP연합 형성을 구체화해가자 신한국당의 이회창도 민주당의 조순과의 연합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홍성우를 물리치고 총재에 당선된 이기택은 당이 침몰해가자 서울시장이었다가 DJ와 결별한 조순을 민주당 총재로 영입했었다.

DJP연합에 대해서 통추의 일부 세력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주장 앞에 자신들의 주장을 접었다. 국민회의 합류거부파에게는 DJP연합의 등장은 국민회의 합류를 하지 않을 명분을 제공했다. DJ-JP가 지역주의 보스에다가 부패정치인이어서 이회창-조순 연합이 지역주의나 부패의 원죄가 없다는 점에서 더 명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회창은 내가 통합민주당에 있으면서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이후 그를 민주당으로 영입하려고 접촉했을 당시 꽤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의식의 일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감사원장이었을 당시, 나는 91년의 남북총리고위급회담에서 벌어진 대통령훈령조작사건을 93년 국회에서 밝히고 그로 하여금 안기부를 최초로 감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넘겨줬고 그는 원칙대로 감사해서 남북고위급회담대표 특보이자 안기부장 특보인 이동복을 해임 조치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97년에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JP를 총리에 지명했으나 원내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한나라당은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패배했으면 승자로 하여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총리인준을 하루 속히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나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DJ정권은 야당의원 36명을 여당으로 이적 시켰다. 야당을 설득하거나 대화하지 않고 비리 캐기, 협박 등으로 의원들을 끌어갔다. 뒤에 무죄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사정의 대상이 되었다. DJ정권은 DJP연합의 우당인 자민련에게 3명의 의원을 꿔주어서 교섭단체를 구성토록 해주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붕괴위기에 처해 우왕좌왕했다. 겁이 나서 투쟁에 나서는 인사들이 없었다. 이회창은 나에게 당을 지켜달라면서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회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나라당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한 것도 졸렬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야당의원 36명을 여당으로 끌어가고 자당의원 3명을 우당에게 대여해주는 집권당의 행위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3김은 분명히 민주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야당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자 야당의원 빼가기는 멈췄고 JP총리인준은 98년 8월에야 이루어졌다.

이회창은 1999년 초 나에게 원내총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내에는 이미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박희태를 비롯, 3선 이상의 다선 의원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일부 재선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나서려는 의원들이 없었다. 의원들에 대한 사정 위협이 계속되니 표적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다음해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벌이게 될 선거법 협상이 야당 총무의 어깨에 지워진 가장 큰 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원 36명을 여당에 빼앗기고도 아직 제1당의 지위는 겨우 유지하고 있기는 했어도 다음 총선에서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대응하다가는 얼마만큼 추락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경압박을 일상적으로 가해오는 DJ정권에 대응하는 일도, 더구나 시대의 흐름과는 담을 쌓고 강경보수의 본색을 조금도 바꾸려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주류를 설득할 자신도, 16대 총선을 앞두고 닥치게 될 선거법 협상과 공천문제도 모두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연초의 휴회기간에 잡아놓고 있던 미국후원회 방문 일정에 나섰다. 이회창은 미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총무경선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응했다. 그는 지난해 야당파괴저지 투쟁 당시 나의 활동에 감사한다면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제1당을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힘든 협상과정에서 여당의 총무 손세일, 한화갑, 박상천 세 사람을 상대해 협상해야했다. 물론 이회창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했어도 홍성우 변호사를 총선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하고 윤여준과 내가 참여한 공천은 김윤환 이기택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파란을 불러 일으켰고 선거법 협상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는 16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야당파괴에서 살아났고 16대 총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은 차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된 나는 이회창의 보수색채 강화에 브레이크를 걸려하고 개혁노선을 자주 강조했다. 2000년 DJ정부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난 비방을 퍼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점진적 대북자세전환을 요구했다. 물론 16대 총선 직전에 DJ정권이 정상회담 일정을 미리 발표함으로써 선거에 남북관계를 이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었다. 유권자들도 통일 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여 선거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남북관계 통일문제 등에 내가 전향적인 주장을 펴자 민정계를 비롯한 보수파 중진들은 "당을 떠나라", "빨갱이 아니냐"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드러냈다.

나는 점차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정치세력의 중심부가 그 같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북관계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사회 내부의 화해 공존도 심각한 장애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97년 IMF외환위기의 발생과정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은 패배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인 노동자 농민들의 고통, 기업구조조정에서의 무리와 부정부패, 선거를 앞두고 경기부양을 위해 남발된 신용카드로 인한 위기와 그에 따른 신용불량자들의 양산과 가계위기 등에 대해 한나라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DJ정권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만 매달리면서 국민들의 경제적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우리지 못했다.

나는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이회창의 압도적 우위에 맞서 나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거나 변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라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회창은 주류론, 즉 DJ정권등장으로 정권을 빼앗긴 한국 사회의 주류 즉 영남중심의 전통적 보수세력이 다시 복귀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나는 남북화해와 민주개혁을 내세우는 세력이 한나라당의 주류가 되어야 탈냉전시대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한나라당이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신주류론''을 내세워 투쟁했다. 결과는 이회창, 최병렬에 이어 3위, 15%의 득표에 그치는 완패였다. 15%의 득표도 적지 않은 것이라는 위로의 말도 있었지만, 돌밭에 모심기하는 짓이라고 자학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운동 막바지까지 미군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을 위한 집회, 농산물개방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항의운동에 한나라당후보가 관심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보수일변도의 그의 행보를 가능한대로 중도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고통당하고 있던 국민 곁으로 다가감으로써 득표에 도움을 주게 할 뿐 아니라 선거 이후에 승패에 관계없이 한나라당의 노선을 중도우파노선으로 이끌어 보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미군장갑차 희생 여중생을 위한 추모농성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지자들 속에서 알레르기 비난 반응이 일어났다. 그 방문을 주선한 나와 박계동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이 같은 퇴영적 자세로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다시 이회창의의 대선패배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에서는 나와 개혁파 의원들에 대한 수구 보수파의 색깔론 공세가 강화되었다. 최병렬 김용갑 정창화 이상배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지난 5년간 한나라당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헛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년 말 거의 같은 시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던 제정구의원이 99년 초에 세상을 등졌다. 그가 있어 한나라당의 변화 노력을 함께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주 생각해본다. 그래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 일하면서 보람으로 기억되는 일은 1999년에 ''제주 4.3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여야합의로 성사시킨 일이었다. 제주도민들과 당시 한나라당 소속 3명의 국회의원 양정규 현경대 변정일이 찬성하고 여당이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당론을 어렵사리 동의 쪽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4.3특별법은 그후 과거사법 입법의 효시가 되었다.

5. ''독수리 5형제''로 17대대선 이후 한나라당 탈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과정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민주당에서도 DJ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지난날의 통추세력과 신진세력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낡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서 벗어나 국민통합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당의 짙은 DJ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듯 했다. 나를 비롯한 한나라당 안의 개혁세력도 그 같은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 형성을 시도했지만 대다수 의원들은 "당을 떠난다"라는 결단에는 거의 움츠러들었다. 최종적으로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등 5명이 결단했다. 이 5명이 먼저 한나라당을 떠나 벌판에 나서서 결단을 못하고 있던 민주당 안의 새 세력을 이끌어 내기로 했다. 언론은 우리 다섯 사람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정당이 열린우리당이었다. 96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분당으로 공중분해된 통합민주당의 분신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이른바 강남벨트에 속한 나의 선거구 서울 강동갑구의 성격으로 미뤄 나의 한나라당 탈당 때문에 총선에서의 낙선이 예상됐다. 더욱이 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자 91년부터 나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했던 구청장 김충환이 나에 대한 대항마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나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했다. 총선에서 낙선은 했어도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정치발전에 기여했지만 나 자신은 그 제물이 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다. 나는 열린우리당의 상임중앙위원(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6. 2004년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국회파행과정

열린우리당에는 그 이전의 정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흐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17대 총선이 끝난 뒤 확인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주류, 이른바 노사모와 386정치인들이 그들이었다. 노사모 인사들은 지난날의 민주화운동 진영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컬러를 지니고 있었다. 노무현과 그의 언행을 광적으로 추수하는, 그래서 취약한 열린우리당의 메카니즘으로는 대통령 권력을 배경으로 그들이 벌이는 집단적 섹티즘을 견디어낼 수 없었다. 정당의 위계가 무너지고 의원총회 혹은 중앙위원회에서는 당론이나 당규가 그들의 집단적 섹티즘으로 뒤바뀌거나 무시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중진의원들이 이른바 젊은 ''노빠''의원들의 공격이 두려워 입을 다무는 일이 벌어지고 당은 표류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거의 무명이었다가 화려하게 대통령으로 등장한 노무현을 따라하려는 무수한 ''노무현 복제판'' 정치인들의 경연장이었다. 이렇게 당이 통제불능 상태로 접어드는데도 노무현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당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당정분리''를 내세우면서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당의 중심인물들을 뽑아내 입각시켰다. 그나마 당의 중심으로 기능해야 할 인물들마저 행정부에 입각하자 당은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17대 총선에서 152석으로 과반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의 지도부는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의 입법)을 비롯, 100대 과제를 내세웠다. 과욕이었다. 대선 패배 후 박근혜 대표를 구원투수로 내세운 한나라당은 적절히 강온전략을 구사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서투른 과욕정치실험을 민심의 바다에 밀어 넣고 흔들어댔다. 나는 정동영의 통일부장관 입각과 신기남의 의장낙마에 뒤이어 2004년 8월 당의장에 취임하여 9월부터 시작된 정기국회 동안 거친 싸움과 협상을 이어갔다.

2004년 8월에 있었던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코멘트는 그 법의 폐지를 관철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한, 열린우리당 의원 152명 가운데 약 절반이 반대입장이었다. 17대 총선공천자들 가운데에는 관료 경제인 학계 출신 등 보수적인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당선자들 가운데에는 민주화운동 출신이나 진보적 견해를 가진 인사들이 늘어나지 않았다.

집권당의 의원 이념분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의 압박 수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폐지를 요구하는 재야와 시민사회 세력이 혹한 속에서 한 달 간의 국회 앞 농성을 벌였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폐지를 관철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법도 아닌 국가보안법을 여당만의 단독강행처리를 하라는 것은 야당의 결사반대가 아니더라도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국가보안법의 ''찬양 고무 동조 및 회합 통신''의 처벌조항 등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를 탄압해온 독소조항을 야당과 협상하여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내가 제안한대로 여야의 당대표와 원내대표 등 4자회담이 열렸다. 그 협상에서 국가보안법의 기본권 탄압조항들을 여야합의로 개정하기로 했으며 사학법, 신문법, 과거사법은 여당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결국 여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고 독소조항만 걷어내는 개정안에 합의하는 대신 다른 개혁입법은 거의 그대로 얻어내는 실익을 얻는 것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기는 정권을 한 번 더 잡은 후 차기 정권에서 얻어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자회담의 여야합의는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이른바 강경파 소장의원들의 거부로 파기되었다. 여야4자회담은 당론의 위임을 받아 열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합의는 의원총회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추인의 의제이어야 했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합의사항의 추인을 요구하지 않고 가부토론에 부치자 농성 중이던 강경 소장파 의원들이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합의사항은 파기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천 원내대표는 사퇴해버렸다. 협상을 주도한 당의장인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공공연히 있었다. 국가보안법으로 4차례 구속당하여 7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해본 나 자신만큼 그 폐지를 갈망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과 국가보안법 탄압시대에는 탄압당해본 적이 없는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자유롭게 외쳐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는 시대를 맞아 인기에 영합하다가 정작 국가보안법을 악법 그대로 온존시켜주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용맹하거나 시류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조타수 역할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가는 과거와 현재 어느 때나 어느 공동체나 경험해온 바다. 지금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한 4대 개혁입법 파동은 열린우리당의 몰락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 레임덕의 시작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도 별로 이론이 없을 듯 하다.

1)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으로 분열상태에 빠졌다.
2) 한나라당은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끊임없이 ''친북좌파''로 몰아 국민으로부터 고립시 키는 계기를 잡았다.
3) 결과적으로 남북화해정책의 동력을 잃게 만들었다.
4) 종국적으로는 정권을 내놓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나 자신도 당의장에서 물러났다. 마치 나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폐기되지 않을 것처럼 비방 비난이 난무했다. 나는 당을 떠나서 진보-보수, 영호남, 세대로 나뉘어 갈등 대립하는 한국사회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중도주의운동이라고 판단하여 중도적 시민운동 ''화해상생마당''을 결성하고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나는 곧 사정의 대상이 되어 법정에 서는 입장이 되었다.

7. 재야운동과 현실정치의 차이.

재야운동은 정권의 획득이나 이윤의 추구 등 목전의 이익이나 목표를 얻어내려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혹은 장기적 지향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은 지난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혹은 민주화운동 같은 지사적 운동에 역사적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비해서 현실정치는 2년 내지 4년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우선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국민의 지지, 득표에 연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60~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시대가 지속되면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절실한 과제 때문에 재야운동과 제도권 야당이 함께 제휴․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제도권 야당 안에서도 재야세력을 자신들과 가까이 해야 하므로 선명한 명분을 선점하는, 따라서 군사독재로부터 어느 쪽이 더 혹독한 탄압을 당하느냐가 선명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함께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극우적인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언제나 용공, 좌경의 색깔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제도권 야당으로서는 민주화에는 같은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 즉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도 재야운동은 명분이나 운동에 기울었다면, 제도권 야당은 실현가능한 제도를 얻어내는 실용적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재야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제도 정치권에 참여한 인사들 가운데 적응에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건이 너무 다른 현실정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제도정치권에서는 재야시절의 명분이나 선명성만으로는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지세력을 많이 결집해낼 수 있는가, 필요한 정치자금을 얼마나 동원해낼 수 있는가가 선명성 명분과 함께, 아니 그보다도 더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지역주의와 연줄, 그리고 보스정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도 정치권에서 젊은 시절부터 돈 버는 일과는 담을 쌓고 감옥 드나들기를 밥 먹듯 했던 재야인사들에게 정치권에서의 성공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을 했던 운동가들이 겪었던 독립된 나라에서의 고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재야출신 인사들이 정치권에 착근했더라도 재야시절의 목표나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갈등 대립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8. 끝내는 말

요즈음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다시 회자된다. 60년대에 대학 철학 강단에서 자주 듣던 이 말이 다시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듯하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민주화일까, 산업화일까.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성취하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각각 서로 다른 비전과 세력들을 기반으로 성취함으로써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흐름인 듯이 주장되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봉건왕조시대의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고 국민이 주인인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민주공화국 국체를 내세웠을 뿐 아니라 국민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의 방향도 뚜렷이 했다. 사실상 우리 민주화의 연원은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선포에 닿아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에 비해 6.25한국전쟁의 폐허 이후 외자도입으로 본격화된 산업화는 식민지 수탈, 전쟁파괴로 생존의 벼랑에 몰린 국민 대중을 먹여살려야한다는 절박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대한민국 국민대중의 필요를 각각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이제 우리 국민은 집권자를 비판한다고 잡혀가고 고문당하는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부정선거로 주권을 강탈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전복당하는 수모도 겪지 않을 것이다. 아직 부의 불평등, 양극화를 겪고 있어도 사회안전망과 의료보장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가 마련되어가고 있다.

바로 주인(국민대중)의 부름에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응답한 일이 민주화요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 혜택은 부족하기는 해도 온전히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주인은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서로 경쟁시키고, 주인에게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때로는 심부름꾼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날뛰다가 주인에게 혼뜨검하는 일도 있었다.

독일 철학자 G.W.F. 헤겔의 역사철학에 나오는''역사의 간지(奸智)''라는 말이 떠오른다. 시대정신은 역사의 흐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시대정신의 이성의 전개에 역사의 흐름이 봉사하도록 이끈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국민대중의 부름이라고 해석한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부름에 봉사한 것이었다. 부름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내 나름대로(주관적으로) 헤아려본다. 20세기 내내 억눌렸던 한반도 구성원의 자유의 해방 아닐까. 분단의 해소, 즉 대륙과 해양의 원활한 소통의 접점 노릇을 준비하라는, 문명의 소통과 대화를 주선하여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준비하라는 부름이 그 지향이 아닐까. 국민대중은 이미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력군의 공로를 인정했고 포상했다. 이제 주역들은 주인의 부름의 다음 지향을 헤아리고 협력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연초 구정 전 아는 좋은 벗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북한출신 젊은이 몇 사람과 남한산성 산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폐쇄성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3명 중 2명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민주화 산업화한 것을 보고 그들은 이곳으로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동남아 여성들도 새 삶을 찾아왔다. 이제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 영호남이, 보수-진보가, 세대들이, 민주화세력-산업화세력이 서로 대립-갈등하는데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담을 여유가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들을 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나 자신에게마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보아야겠다. 자기 개인의 안락에 방해가 된다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그럴만하다고 이해되는 사회라면 이미 깊은 사회병리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인은 이미 웃으면서 받아들였는데 심부름꾼들이 자신들의 성과에 잿물을 뿌리면서 우리를 부러워해서 찾아온 손님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눈을 들어 멀리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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