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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③-1

박재혁 의열단,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격동의 시절, 부산에서 태어나다"


괴질의 시대가 왔다

박재혁이 태어나기 20여 년 전인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포가 개항하였다. 초량왜관은 치외법권 지역의 일본 전관거류지로 개방되었다. 1880년 2월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동시에 영사관 경찰소를 부설하였다. 1885년 10월에는 재조선국 부산일본재판소를 두었다. 영사는 이 지역의 실질적 삼권의 지배자였다. 대부분 기관은 초량왜관 부근에 있었다.

부산의 용두산 부근을 일본인의 편리를 위한 철저한 계획도시로 만들어갔다. 영사관 건물을 중심에 두고 그 둘레에 경찰서, 은행, 병원, 상업회의소, 전신국 등 공공건물을 배치하였다. 왜관 시절 사방에 있던 돌벽과 성문, 수문을 허물어 일본인의 영역은 용두산 지역을 넘어 점차 초량・부산진 지역으로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는 부산 속의 일본이었으며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일본 무역선을 통해 들어온 콜레라(호열자)는 부산을 죽음의 마을로 몰아넣었다. 호랑이에 물린 듯한 고통을 주는 괴질이었다. 1879년 수백 명이 죽었다. 1886년 5월 다시 대유행하여 매일 20여 명이 발병과 사망을 했다.

인근 지역인 마산, 창원, 웅천 등지로도 콜레라가 번져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상도 지역의 콜레라 발병 현황을 보고한 경상도 관찰사 남일우도 이때 콜레라에 걸려 7월 7일 사망하였다.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죽어 황현은 “대략 한 도의 호구 수가 줄어들 정도”였다고 했다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겨라

경주 출신 최제우는 ‘내 마음 안에 한울(하느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 侍天主).’며 조선 민족의 머리에 세계 혁명적 대사상을 심었다. 양반과 상민, 천민 그리고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들 모든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吾心卽汝心, 오심즉여심–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있으니 한울같이 섬겨라. 모든 인간 존재가 평등하다. 인간은 하늘과 같이 존엄하시다. 하느님은 하는님이시라 노는님이 아니다. 하늘 위에서 눈도 꿈적 안 하며 군림하시는 자가 아니다. 이 사상은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한 서학(천주학)과 다른 동쪽의 사상, 즉 동학이다.

최제우는 ‘하늘과 같이 사람을 섬기라(사인여천, 事人如天)’ 하였고,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 人乃天)’하였다. 동학의 인본주의적 사고는 계급철폐와 봉건제도의 타파를 지향하는 반봉건 사상이요, 척양척왜의 반외세 사상이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괴질 대처법으로 “침을 아무 데나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라. 코나 침이 땅에 떨어졌거든 닦아 없애라. 먹던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을 새 국에 섞지 말라. … 이리하면 연달아 감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괴질이 창궐하던 시기에 올바른 위생법을 알려 민중의 마음을 얻어 교세를 확장하였다. 동학에 들어가면 괴질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부패한 나라의 괴질의 해결법은 달라야 했다.


1894년 다시 대유행하였다. 사람들은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며 난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호열자 같은 부패 관리에 대한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민중들은 개벽을 기다렸다.

 

세상을 개벽하라!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프랑스 유학 출신의 민족주의자 홍종우에 의해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암살당했다. 낡은 시대를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시신은 부관참시를 당하여 8도에 내걸렸는데, 참수된 머리는 서울 양하진 저잣거리에 홍종우가 쓴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 깃발과 함께 내걸렸다. 혁명의 실패는 죽음뿐이요, 남는 것은 이름이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1894년(고종 31) 4월 27일 조선왕조의 본관, 전주성에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 아래, 백성이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개벽의 봉홧불을 밝혔다. 괴질에 걸린 병든 사회를 개벽하기 위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위시한 농민군이 죽창을 들고 일어났다. 탐관오리 축출, 신분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농민의 반봉건 운동이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백산에서 동학 지도부는 격문을 발표했다.

“우리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이곳에 온 것은 그 뜻이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에 정부는 노비제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폐정 개혁을 요구한 농민군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갑오개혁(1894.7~1896.2)을 하였다. 이때 조선 관군의 패배로 정부는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자, 이어 일본군도 들어왔다.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이제 수령 쫓아내기를 넘어서서, 아예 세상을 뒤집자며 다시 일어섰다. 자주적 정부 수립을 위해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개입으로 반봉건을 넘어 반외세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막강한 일제의 기관총 앞에 죽창으로 이길 수 없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무참히 패배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반봉건 반외세 정신으로 이후의 역사적 과제를 던졌다.

 

1894년 일본인 사쿠라이 군노스케는 「조선시사(朝鮮時事)」에서 “조선은 유럽 여러 나라들 사이에 끼어 쟁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은 이미 멸망의 도장이 찍힌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동양에 위치하여 의협심이 강한 일본 제국에 의지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복 있는 나라가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조선인은 대부분 일본인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지만,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일본인을 자상한 아버지처럼 여기고 순순히 존경의 뜻을 표한다.”라고 하였다.

과연 조선사람 중 일부는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부산 사람들은 어떻게 일본과 만났을까?

 

부산 인근에도 동학운동이 있었다

전라도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에도 동학농민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동학농민군은 경상남도에까지 밀려왔고 부산의 일본인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부산과 가까운 창원에도 1894년 7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 두 명의 동학도가 경남 지역 각 읍을 순행하다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들이 다녀간 읍과 관서에 창원(7월 29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25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항의가 동학당이 창원 등지에 모여 있다는 장계를 의정부에 올렸다.

울산의 언양에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1894년 8월 말 언양현 주민들이 봉기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아전들의 집을 불태웠다. 농민들의 공격 대상은 아전들이었다. 울산도호부사 한응주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전들의 관리 책임을 물어 언양현감 윤홍식은 파면되었다. 동학 관계자가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현감과 아전들을 투옥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해산시키면서 끝이 났다. 항쟁 이후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일정한 자치가 이루어졌다.

부산에는 일본군 수비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조선 관군은 동학군 토벌에 나갔다. 박재혁이 태어난 1895년 부산 동래부사는 마마(천연두)를 예방하는 우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이었다. 지석영은 부산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1879년 10월부터 지석영은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우두법을 배웠다. 1877년 2월 11일에 설립된 제생병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 근대 의학에 기초한 의술을 선보인 병원이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치료하였다.

병원 가까이 용두산 동남쪽 언덕에는 1884년에 준공된  르네상스 양식에 가까운  2층 목조 건물인 일본 영사관(훗날 이사청)이, 바로 아래에는 영사관 경찰서(훗날 부산경찰서)가 있었다.

제생병원은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투탄으로 다치자 치료한 부산부립병원(1914년 4월 개칭, 현 부산대학병원)의 전신이다. 이때 지석영은 일본인 거류민들의 한국어 사용 책인 『인어대방(隣語大方)』의 교정을 하다가 국문법의 원리를 깨치고 이해하게 되었다. 한글학자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1905년 광무황제에게 한글(국문) 사용 상소를 하였다.

 

 동학 토포사 지석영, 동래부사가 되다

종두법을 더 배우기 위해 지석영은 1880년 6월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갔다. 그때 통역관으로 간 사람이 부산의 통역관 박기종이었다. 지석영은 개화파를 옹호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유배 등의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종두 검진은 국민의 의무로 규정되었다. 마마(천연두)로 인해 곰보가 되는 사람은 이제 현저하게 줄었다. 지석영이 주도한 우두법 도입은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주적인 근대 의료의 기틀이 되었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지석영은 대구 판관으로 토포사가 되어 부산에서 들어온 일본군과 함께 경상도 남해지방의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1894년 9월 26일 토포사 지석영은 대구 관아를 출발하여 28일 부산항 감리서에 도착해서 일본 영사관을 찾아 토벌 방도를 상의하였다.

29일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에 도착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 10월 2일부터 고성, 사천, 진주, 남해, 하동 일대의 동학군 3천여 명을 일본군과의 합동 작전으로 토벌하였다. 10월 말경에 토포사 임무를 끝낸 지석영은 대구로 복귀하였다. 진주목사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일본 총영사는 “지석영은 다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일본군 기타를 위하여 매우 유익한 인물”이기에 유임하기를 희망하였다.

1895년 지석영은 토벌의 공으로 4월 29일 동래부사로 부임하였고,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지방관제공포(地方官制公布)로 5월 29일 동래부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896년 1월 18일 부산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으나, 1896년 8월 4일 칙령 36호로 공포된 제2차 지방관제 개혁으로 8월 6일 면직하였다.

동래부사로 있을 때 일본 영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는 지석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지석영이 “오늘날 약간이나마 러시아를 숭상하는 생각을 품고 몰래 일본배척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공식 석상에서 ‘왜노(倭奴)에게 부동(符同, 결탁)함은 마땅하지 않다’라는 등의 언사를 내뱉고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본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지석영은 1909년 12월 12일 일생일대의 오점을 남긴다. 바로 안중근이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문을 낭독한 것이다.

혼돈의 시대였다.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과 이를 저지하는 보수 반동의 세력이 있었고, 이 기회를 통해 조선을 침략적 간계를 가진 일본이 있었다. 모두가 제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뿐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는 시대였다. 그때가 1895년 박재혁이 태어난 시기이다. 괴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세우다

1894년의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의 랴오둥 반도 등을 할양받았다. 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 3권의 간섭으로 1주일 만에 반환하였다. 일본은 친러정책의 핵심으로 여긴 고종의 부인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10.08.)을 일으킨다. 한나라의 왕비가 살해당하고 능욕당한 수치는 세월이 가도 민족의 뇌리에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다.

김홍집 내각은 종두법 시행과 단발령을 실시하고, 소학교를 설치하는 등의 을미개혁을 한다(1895). 하지만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최익현을 위시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유생들은 봉건적이지만 반외세적인 위정척사 운동의 입장이었다. 단발뿐만 아니라 복장까지도 점점 일본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이 사람들에게는 있었다. 조선의 서양화는 곧 일본화였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죽음이 두려워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고종의 머리를 깎은 정병하와 단발령을 내린 김홍집은 성난 군중에 맞아 죽었다. 정병하는 밀양부사로 있었을 때, 통도사 여승으로 은거하고 있던 친구의 딸 배정자(1870~1952)를 일본으로 보냈다. 배정자는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갔다가 그의 수양딸이 되어 첩보원의 교육을 철저하게 배웠다.

배정자는 왕실에 침투하여 고종의 모든 정보를 이토에게 전해준 밀정 중의 밀정이었다. 배정자에 빠진 고종은 내밀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망명까지 이야기하여 들통나고 헤이그 밀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흑치마 사다코 배정자가 모자를 쓰고 궁궐에 자주 들어가서 나라가 망한다고 대안문(大安門)이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치호는 1904년 4월 26일 일기에서 “오늘날 조선 정치세계에서 권력의 원천은 배정자”라고 한탄하였다. 그녀의 일생은 철두철미 악질 반민족 부왜인의 삶 그 자체였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었다.


 

세상은 점점 더 어수선해졌다. 조선 왕실은 러시아 공사관의 방 세 개를 빌려 사는 셋방살이를 하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한때 민비의 상궁이었던 엄씨는 임신하여 영친왕을 잉태하고, 고종은 커피(가베) 맛에 빠져있었다.

고종은 일급 기밀을 배정자에게 바쳤다. 1897년 개혁은 후퇴되어 단발령과 내각제가 폐지되고 음력이 다시 사용되었다. 지방 행정구역도 23부에서 13도로 환원되었다. 자주적 열기는 높아 독립문이 세워졌다. 고종은 환궁한 후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로, 국호는 ‘대한’으로 바꾸고 10월 12일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대한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제국의 자주독립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이 기고는 오마이뉴스, 폴리뉴스 동시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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