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학폭’의 가해자는 열 살 먹은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였다. 같은 반 옆자리 여자아이의 손등을 샤프연필로 찌른 것을 포함해 모두 3명을 괴롭혔다는 ‘혐의’였다. 학교 안에서 열린 학교폭력위원회는 가해 아이에게 반을 옮기고 피해 아이에게 사과문을 보낼 것을 결정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던 주변의 수근거림에 아이의 어머니는 다니던 성당에마저 발을 끊었으며, 집에서 동네아이들을 가르치던 과외교습을 그만 뒀다. 

시간이 지나 이제 그 아이는 작곡가를 꿈꾸는 열여덟의 고등학교 2학년생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면 유명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희망의 크기만큼 자라난 걱정이 떠나질 않는다. 언젠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학폭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뜨거운 화인(火印)이 되살아날까 싶어서다.

2017년 미국의 영화계에서 시작돼 한국으로도 번진 ‘미투’(ME TOO) 폭로는 연출가 이윤택을 감옥에 넣는 등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짖궂은 손’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못된 손’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직장문화는 물론 남녀의 관계까지 바꿔놨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또 다시 체육계에서 시작된 학폭 파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피해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투보다 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미투 폭로는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성폭력에 맞춰졌지만 학폭은 성별을 가리지 않은 온갖 폭행의 양상들이 등장하고 있다.

미투와 마찬가지로 학폭 피해의 고백과 폭로에는 자신의 영혼과 마주해야 할 만큼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마저 신상을 탈탈 털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누리꾼들의 한국에서 이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는 한국의 ‘성폭력 미투’ ‘학폭 미투’는 이처럼 너무나 야만적이다. 뿐만 아니다. 일단 가해자로 지목되면 여론은 사정 없이 확신과 단죄의 칼날을 들이댄다. 한 배구선수는 이름이 오르내리자 말자 곧바로 은퇴선언을 했다. 아직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만일 그의 혐의 중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피해자에서 옮겨가 가해자의 자리에는 익명의 대중들도 서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물론 영혼에까지 상처를 준 모든 범죄는 단죄되고 처벌받아야 한다. 그 단죄의 주체는 법률이 될 수도, 가해자의 양심일 수도, 사람들의 평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법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평판을 두려워해 타인에게 가하는 위해를 비롯해 악행을 제어한다. 만일 죄를 저지른 이가 있다면 사회와 개인은 선악의 고리에 대한 이 같은 성찰을 바탕으로 처벌과 관용을 동시에 병행한다. 엄한 처벌과 함께 관대한 재기와 만회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는 합리적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의 정수이며 그래서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더 값지게 살찌웠다.

한국사회는 과연 어떤가. 혐의가 규명되지 않은 채 학폭 가해자라는 얘기만 나와도 당사자의 명예는 물론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소문이 SNS의 기제가 작동하자마자 파문으로 연결되는 사회에서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비난과 처벌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러니 잘못을 저지르고도 ‘남의 흉은 사흘 흉’이라는 투로 거짓과 변명을 하고 변호사를 앞세운 채 뻔뻔하게 버티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파계를 한 종교인에게 내려지는 파문이 함부로 행해지는 사회는 죄를 숨기려는 위선자를 낳는다.

한번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는 기회의 문이 열리지 않는 이 같은 한국적 ‘원스트라이크아웃제’는 정작 엄격하게 적용돼야 할 곳에는 불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성범죄를 저지른 교육공무원에 대한 처분이다. 2015년 교육부는 '교육공무원 징계양정 등에 관한 규칙'을 개정해 성 관련 비위 교원에 대해서는 최소 해임이나 파면 조치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지난 20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이 지난 2018년의 정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들 교사에 대한 징계는 제도가 정한 수준에 비해 훨씬 낮았다. 

원스트라이크아웃제는 잘못을 저지른 공직자일지라도 최대한의 신중함과 엄격한 절차를 거쳐 적용돼야 한다. 의도된 잘못이든, 순간의 실수든, 한 사람이 인생에서 쌓은 신뢰와 생계의 기반을 완전히 허물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함을 상실한 채 제 식구 봐주기 식으로 고무줄의 잣대를 들이대는 문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스포츠 스타 등 유명인도 한때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다.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이유만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지기도 전에 온갖 비난과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은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정반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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