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가담한 일 외교관, "생각보다 간단해 놀랐다" 감상까지 곁들여 
일 아사히신문 보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상세히 담긴 가치 높은 자료”

명성황후 추모제 모습 (사진=연합뉴스)
▲ 명성황후 추모제 모습 (사진=연합뉴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고 밝힌 일본 외교관의 편지가 발견됐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가 명성황후시해 다음 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이 발견됐다고 1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서신은 호리구치가 1895년 10월 친한 친구이자 한학자인 타케이시 사다마츠에게 보낸 것이다. 호리구치는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로 머물고 있었으며 일본 외교관과 경찰, 민간인 등 을미사변을 일으킨 무리들 중 한 명이었다. 

호리구치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 쓴 편지에서 자신이 황후 시해를 위해 벌인 행동들을 자세히 적었다. 호리구치는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며 “담을 넘어 간신히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밝혔다. 그는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고도 덧붙였다.

아사히신문은 이 서신에 대한 한반도와 일본 관계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대 명예교수(일본근대사)의 평가도 전했다. 나카쓰카 교수는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사건 후 120여 년이 지나 당사자가 쓴 1차 사료가 나온 의미는 크다”고 평가했다. 

호리구치의 이 서신은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씨가 고물 시장에서 입수한 것으로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다. 편지가 원래 보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재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에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서한을 검토한 김문자씨는 “사건의 세부나 가족 등에 대한 기술을 보더라도 본인의 진필이 틀림없다”면서 “현역 외교관이 부임지의 왕비를 시해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서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아직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한편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등 관련자 48명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모두 석방됐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 8명도 모두 무죄 방면되는 등 당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미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수집한 명성황후 장례 행렬 사진 
▲ 미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수집한 명성황후 장례 행렬 사진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