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인류의 숙명"

초강력 토네이도에 폐허로 변한 미 켄터키주 메이필드 마을. 11일(현지시간) 초강력 토네이도가 불어닥친 미국 켄터키주 메이필드 마을의 주택과 건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폐허로 변해 있다. 전날 밤 미 중부 지역에서는 20여 개의 토네이도가 발생해 최소 8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피해가 집중된 켄터키주의 앤디 버시어 주지사는 '켄터키에서만 사망자가 100명이 넘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사진=메이필드 EPA=연합뉴스>
▲ 초강력 토네이도에 폐허로 변한 미 켄터키주 메이필드 마을. 11일(현지시간) 초강력 토네이도가 불어닥친 미국 켄터키주 메이필드 마을의 주택과 건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폐허로 변해 있다. 전날 밤 미 중부 지역에서는 20여 개의 토네이도가 발생해 최소 8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피해가 집중된 켄터키주의 앤디 버시어 주지사는 "켄터키에서만 사망자가 100명이 넘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사진=메이필드 EPA=연합뉴스>


12일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신규 확진자가 나흘 연속 7000명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사망자도 국내 코로나19 최초 환자 발생 뒤 가장 많은 80명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영화 '괴물'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한강에 괴생물체가 출현한다. 괴물에게 한 소녀가 납치당한다. 가족들이 장례식을 치렀는데 '전화 목소리'를 통해 생존해있음을 확인된다. 살아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방역국은 아빠를 체포해 바이러스의 정체를 찾기 위해 온갖 검사를 해댄다... 

여하튼 결론은 미군 당국자의 말은 '바이러스는 없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엔 이 영화의 키워드는 '괴물 자체'보다 괴생물체에 '반응하는 현대인'의 군상이다. 원인과 진실에 대한 발생론적 추적을 다룬 다큐가 아니다.  미확인물체와 조금이라도 접촉이 있을 법한 사람들은 보균자로 의심, 낙인, 분류, 격리된다. 상징자본들은 연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대한 특종, 변종, 미확인물체, 신종.... 그리고 사망자 등을 통해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가짜 뉴스와 나쁜 정보의 범람... 대중의 과민반응 등등.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와 영화 속 풍경을 구별하기 어렵다. 도시의 한가운데, 교통의 나들목 근처에 거주하는 죄로, 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19 앰뷸런스의 '삐용삐용'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아시아를 휩쓸었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은 건 '공기'를 통한 전파 때문이다. 그때 호흡기증후군은 40대 이상의 치사율이 가장 높았다. 사스의 등장이 시사한 것은 현대의학의 '오만함'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지나갔다는 것. 

바이러스의 역습은 12년 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다른 이름으로 귀환했다. 사스와 메르스는 닮은 듯 좀 달랐다. 

조류와 낙타... 사스는 중국 광둥성과 홍콩이 활동무대였고, 메르스는 중동이 본거지랬다. 결정적인 차이는 사스 유행 당시 한국에선 한 명의 환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메르스 때는 감염확산 지역에 한국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의 '차이나는 상상력' 하나를 덧붙이자면, 광동성 홍콩 중동이라는 지명과 산업자본 금융자본 석유자본(중동화폐)...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리의 기억력,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같다.  2003년 베이징은 연일 사스에 관한 뉴스가 넘쳐났고, 거리에는 방독용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공건물은 닫혔고 베이징대학은 휴교에 들어갔으며 사람들은 자기집으로 자발적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한국은 한 명의 환자가 없었음에도 9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5000명이 넘는 중국유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귀국하는 장면은 마치 할리우드 재난영화 그 자체였다. 당시에는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는데도 사스에 대한 뉴스는 전쟁을 압도해버렸다. 

우리의 시선, 참 이상하게 작동한다. 한 곳에 고정되면 딴 곳은 보지 못한다. 지난 4일 인도네시아 동부 자바 스메루 화산이 폭발해 1만2000m 상공까지 두터운 화산재를 내뿜었다. 12일 현재 사망자는 50명이 넘었다. 

또 11일 미국 아칸소주에서 수십 개의 토네이도가 한꺼번에 발생했는데, 그 중 하나의 초강력 토네이도가 미주리, 테네시, 켄터키주 등 약 400㎞를 이동하면서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피해가 집중된 켄터키주의 앤디 버시어 주지사는 "켄터키에서만 사망자가 100명이 넘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곧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라 한다. 화산폭발로, 토네이도에 도시 하나가 사라졌다 해도 한국사람 눈끝 하나 까딱 않는다. 

대지진과 화산폭발, 극심한 가뭄, 기후재앙 등과 사회불평등, 인구절벽, 소득격차, 일자리... 숱한 정치경제적 이슈, 민주주의와 선거 아젠다들을 모두 덮어버리고 있다. 수많은 학교가 휴교를 하고 공공기관의 행정이 줄줄이 멈추고, 사람들의 일상은 심각하게 위축돼... 코로나19에 대한 불안이 삶을 온통 잠식해버렸다. 정부 당국의 무능에 대한 불신, 항의, '물백신' 접종 반대. 다른 한편으로는 통계와 수치가 주는 압박, 그 결과 대중은 자기도 모르게 '원시적 공포'에 시달리면서... 

왜 이럴까? 

우리의 시선이 바이러스에 고정됐기 때문이다. 시선 고정은 어쩌면 '중독'과도 닮았다. 우리의 시선에 유연성이 사라지면 '관성'과 '내성'이 생긴다. 먹고 싶은 것만 먹는 편식,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편향성이 형성된다. 이와같이 형성된 '중독' 병리현상을 정치사회로 확장시키면 '프레임'과 '진영', 상스럽게는 '패싸움'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미셀 푸코는 현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두고 '생체권력'이라 불렀다. 인간은 어떤 '패거리'에 오래 감금되면 과도한 밀집, 지나친 밀착문화에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 지점이 바이러스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란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무지가 곧 두려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예측불허다. 이 예측불가능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변종'이라는 이름이다.  인류 문명이 여태 일궈온 과학과 기술이 '무화'되는 지점이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노래말처럼, 인간의 초현대 의학 방역망은 늘 무시당하고, 미사일 최첨단 기술적 공격도 불가능하고, 하이퍼지능의 발본색원은 더더욱 어렵다. 

정말 바이러스에 대한 대책은 없을까? '손 씻고 마스크와 거리두기' 밖에 없을까? 여기에 현대 최첨단 의학이 내놓은 기막힌 처방, '빡신' 

결론부터 말하면 "어차피 완벽한 백신은 불가능하다."  감기를 치료하는 약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면역력"이다. 면역력은 과학적 기술적 의료적 수치와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영국처럼 "국가가 여기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국민은 '각자 살아남으시오'라는 식의 정책이 앗쌀하다. 이제 '괴물이 나타났다' '싸워서 이겨라' '박멸하라'라는 식의 의료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환자들 역시 병원의 한계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염병이 아무리 휩쓸어도 생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진의 잔해와 전쟁의 포염 속에서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시장'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재래시장과 백화점이 닫히고 여행과 관광업, 식당 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그토록 열망했던 '자본의 급속 냉동 상태'를 목격한 셈이다. 제국도 국가도 자본도 신자유주의도 속수무책이다. 엉뚱발랄하게 말하자면, 야수자본의 약탈과 사회시스템을 개혁하는 것도 바이러스에 달렸다? 아무튼 바이러스는 정말 힘이 세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 삶 전반에 대해 심오하고도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바이러스는 결코 적이 아니다. 우리 '지금의 삶의 방식'이 적일 수 있다. 후딱 지나가기만을 바라지 말고...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집콕'이라는 기회를 부여했다. 지금은 자본의 황혼기 또는 빙하기에 진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방구석'에 들어앉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 안과 바깥,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기회... 지적 상상력, 철학적 비전, 문명적 대탐사, 내 안의 우주적 리포트 등을 가능케 하는 '역동적 시간'으로 말이다. 

바이러스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귀환할 것이다. 전혀 다른 이름으로... 코로나19는 인류의 숙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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