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 (불교진각종 금강원 대구도량)
▲ 현각 (불교진각종 금강원 대구도량)

나는 지금 ‘세상의 끝’에 서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피니스테레, 즉 ‘세상의 끝’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북서쪽 피니스테레(Finisterre)라는 지명은 옛 로마 사람들이 끝(Finis)과 땅(Terra)을 합쳐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장 800킬로미터를 걸어 스페인 갈리시아 자치 지방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 생장 출발 꼭 한 달만인 6월 27일이다. 대성당 광장에 전단지처럼 널브러져 있는 순례자들을 보자 여기가 종착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한 조각 상투적인 감흥조차 일지 않았다. 사람들 얘기로는 벅찬 감동에 젖어 울기도 하고, 서로 끌어안고 축하도 주고받고, 마라톤 완주자처럼 환희의 세리모니를 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기라도 할 텐데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인지 그런 마음도 일지 않았다. 굳이 긁어내어 보자면 싱거운 영화의 결말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끝’인 피스테라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끝’인 피스테라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후련하다는 감정이 아쉬움을 압도했다고 해도 좋겠다. 사실 4,5일 전 사리아 근처를 지날 무렵부터는 어서 이 길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우선 길 자체가 신선하지 않았다. 자꾸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왼쪽 발바닥 가운데가 갈라지는 듯한 작열감은 마지막 100여 킬로미터의 여정을 즐기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4,5일 코스만 걷는 단체 순례객들이 급증한 탓이 컸다. 갑작스런 까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 이하 까미노)의 분위기 변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아무리 힘들게 걸어온 사람들도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한 걸음 한 걸음을 아쉬워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까미노와 인생이 닮았다니까!’ 하고 무릎을 쳤던 나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까짓 남은 인생 살아본들 뭐하누. 이제 그만 갔으면 좋겠다.’하면서도 막상 갈 때가 되면 단 하루라도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 경우는 달랐다.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 인증서를 받아들어도 한 번 가라앉은 마음은 전혀 떠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곧장 알베르게(여행자 숙소)로 향했다. 12시에 하는 대성당의 미사는 어차피 내가 도착하기 전에 끝나버린 터여서 거대한 향로가 앞뒤로 그네를 타는 진풍경을 볼 기회는 일찌감치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순례 한 달 만에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에 도착했다.
▲ 순례 한 달 만에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에 도착했다.

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안장된 이 뜻깊은 대성당을 밖에서만  간다는 게 걸려 잠시 묵례(默禮)로 한 성인의 생애를 추모하고 성당 광장을 벗어났다.

다음날 27일 아침 마음을 좇아 묵시아행 버스를 탔다. 묵시아는 “땅끝까지 가서 선교하라”는 그리스도의 명을 받은 야고보 사도가 생애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던 곳으로 알려진 작은 어촌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문득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 한다. 묵시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에서 참수당해 순교한다.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였다. 한동안 발견되지 않던 야고보 사도의 시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극적으로 발견된다.

어느 날 성 펠라지오라는 은자(隱者)가 들판 위의 춤추는 듯한 별빛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 잊혔던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콤포스텔라(Compostella)라는 이름은 별들의 벌판(Campus Stellae)이라는 의미가 변형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묵시아는 야고보 사도가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며, 묵시아로부터 88킬로미터 떨어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지금 야고보 사도의 유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안장돼 있다. 이곳이 순례자들의 종착지인 이유다.

.피스테라의 평화로운 항구
▲ .피스테라의 평화로운 항구

묵시아행 버스를 타기로 한 것은 산티아고 대성당을 거쳐 피니스테라까지 총연장 900여킬로를 걷고 싶었던 계획을 왼쪽 발이 허락을 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이건 핑계다. 앞서 밝힌대로 까미노의 마지막 100여 킬로미터의 길은 좀 진부했다. 머릿속도, 기분도, 풍경도 삶처럼 진부했다. 더 걷고 싶지 않다, 그래도 걷자, 라는 생각만 갈마들었다. 그런 터에 피니스테라까지 88키로미터를 더 잇기란 애초에 글렀다. 반면 묵시아에서 피니스테라까지 30여 킬로미터는 갈라쇼를 하는 기분으로 걸어보고 싶었다.

버스는 2시간 30여 분간 내내 졸기만 하던 나를 갯내음 물씬한 묵시아에 내려놓았다. 한 달 내내 산과 들만 보다가 해변에 와서 그런지 내 고향 하동포구에라도 온 듯 편안하다. 방파제 안쪽에는 20여 척의 작은 어선들이 뿔뿔이 흩어져 졸고 있고, 몇몇 어선들은 아예 백사장에 배를 깔고 일광욕 중이다.

아담한 포구는 정겨웠고,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점심 메뉴는 역겨웠다. 생선을 빻아 밥과 버무린 그 이름 모를 음식은 가격마저 무려 24유로(거의 3만 3천 원). 콜라와 디저트가 포함된 가격이라고는 해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30여 킬로에 달하는 피스테라(Fisterra 피니스테라가 있는 곳의 마을 이름)까지 걷기 시작한 게 2시 40분경. 묵시아와 피스테라를 잇는 길이 아름답다는 그 이유만으로 마음을 낸 걸음이었다.

묵시아와 피니스테라 구간은 지금껏 걷던 산티아고 길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서양이 숲에 가려 보이다 말다 밀당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특히 묵시아를 출발한 직후에 만난 해변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다. 무엇보다 피니스테라에서 묵시아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역주행을 하는 셈이어서 그것도 신선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예약해 둔 피스테라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밤 9시 20분. 7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미 퇴근한 호스트를 전화로 불러 간신히 체크인 하고 마을 광장의 한 레스토랑에서 스페인식 아귀찜을 늦은 저녁으로 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인 27일 그러니까 바로 오늘 아침 2.5킬로 떨어진 피니스테라 등대가 있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지점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내 생에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내 생에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나는 ‘세상의 끝’에서 거의 한 시간째 검푸른 대서양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땅의 끝은 바다의 시작이고, 세상의 끝은 돌아서면 다시 세상의 시작인데 나는 무엇을 시작하려 하는가.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소지품을 태우며 제각기 의식을 치른 흔적들이 보이건만 나는 무엇을 태워 내 의지를 다지려 하고, 무엇을 버려 가벼워지고 싶은 것일까. 저 아득한 벼랑 아래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대답을 재촉하고, 느릿느릿 물살을 가르는 작은 배들은 침묵으로 대신하라 이른다. 나도 시인 이백을 흉내 내 본다. 소이부답(笑而不答).

프랑스의 생장 삐에드 뽀흐를 떠나 800킬로미터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5월 28일. ‘가급적 한국인들과 동행하지 않는다’, ‘경쟁적으로 걷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 만큼만 간다’던 원칙 중 첫 번째 원칙은 출발지 생장에서부터 깨졌다.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30대의 아름다운 한국 젊은이들은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안 되는 굼뜨고 허술한 ‘노인네’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게 4명이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를 향해 함께 출발했다. 까미노 800킬로미터가 사람의 일생이라면 이제 우리는 갓 출생하는 신생아에 해당될 것이다. 아직 미련이 남은 어둠이 사위를 휘감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새벽 5시 30분. 모든 중생의 출생이 그러하듯 우리의 출발도 엉성하고 요량 없었다. 탄생의 축복도, 덕담도 없이 얼떨결에 까미노는 시작되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방향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 맵의 도움으로 방향을 잡고 휴대전화기의 불빛을 밟으며 길을 열어나갔다. 차츰 날이 밝아오자 어느새 피레네산맥을 오르고 있는 길벗들의 모습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 옛날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나갔다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걸었던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천지창조를 한 후의 조물주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 천지창조를 한 후의 조물주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사람의 일생 중 유소년기가 가장 아름답듯이 산티아고 길도 처음이 가장 아름다웠다. 인생이든, 까미노든 나중의 험난한 노정은 논외로 두고.

얼마나 올랐을까. 해발 1,450미터 정상은 고사하고 해발 1,000미터 정도에 있는 그 유명한 오리손 산장도 나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들이 구름 위에 올라와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급히 카메라로 인생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저 아래로 솜털 같은 구름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천지창조를 한 조물주가 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거대한 도시는 인간을 압도하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어 소외감과 열패감을 안겨 주는 반면 웅대한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되 인간을 겸허하게 하고 성찰하게 한다. 한동안 피레네산맥과 하늘이 연출하는 대자연의 화려한 향연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피레네산맥 어디쯤에선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라는 작은 표식을 만났다. 출입국 심사는 양국의 나무들이 했고 여권은 내 왼발, 비자는 내 오른발이었다. 입국 금지도, 지연도 없었다. 그저 바람의 환송과 산새들의 환영만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날이 올까.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이렇게 부지불식 중에 넘을 수 있는 날은 통일 조국 아래에서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암울해졌다.

베드로 신부님과 길벗들이 식사 후에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베드로 신부님과 길벗들이 식사 후에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금 더 오르니 오리손 산장이 반긴다. 아니다. 허기진 내 위장이 반겼다. 산장 앞 야외 테이블에서도 저 아래로 세상을 뒤덮고 펼쳐져 있는 흰 구름이 내려다보인다. 크림빵과 샌드위치, 오렌지 주스로 먹는 늦은 아침은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서 보았던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못지않은 ‘구름 위의 식사’였다. 내 생에 이런 식사가 또 있을까.

까미노 중 가장 힘든 코스가 피레네를 넘는 첫날 일정이라고들 하나 내게는 피레네가 주는 감동이 고통을 덮고도 남았다.

론세스바예스~수비리 구간을 지나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거리도 짧고 평탄한 구간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자 온몸이 결리고 아파서 오늘 과연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불안이 밀려왔다. 새벽부터 비까지 내린다. 판초우의를 꺼내 입고 무거운 몸을 떠밀어 간신히 출발했다.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싶다. 다행이다. 걸어보니 걸어지고, 가다보니 가 진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마치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어도 살아보면 살아지는 인생을 빼 박았다.

나중에도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까미노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까미노나 인생길이나 짐이 무거워서는 안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래 갈 길에 무거운 짐은 가장 큰 적이다. 또한 만남과 이별은 기습적으로 온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어놓고 길벗들과 함께 팜플로나 우체국을 찾아간 건 이 길 최대의 적인 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피스테라 마을 전경.
▲ .피스테라 마을 전경.

길벗들이 내 짐까지 대신 부쳐줄 때 나는 우체국 의자에 매우 무책임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나는 그냥 그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고만 싶었다. 그때 웬 늙수그레한 여인이 내 앞에 서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손짓까지 해가며 뭐라고 뭐라고 흥분에 찬 소리를 지른다.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초라하고 지친 행색.

순간, 내가 무슨 피해를 줬나? 하는 생각과 혹시 실성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 간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않고 바라보자 그녀가 이번엔 윙크를 한다. 아... 실성한 사람이 맞구나! 나는 사실 윙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눈보다 입이 더 나댄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눈높이를 맞춰 나도 실성한 사람처럼 윙크를 해 줬다. 그녀가 계속 영어로 떠들어댄다. 이제는 실실 웃기까지 한다. 제대로 실성한 것 같다.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데 멀쩡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다. 주위 사람들은 되레 나를 실성한 사람으로 보았을 게다.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가 정신을 번쩍 일깨운다. “...... 바욘......”

바, 바욘? 바욘이라면? 혹시? 아! 그럼 이 여자가 그녀란 말인가? “아, 아엠 쏘리, 쏘리...”실성은 내가 했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까미노 출발지인 프랑스 생장으로 가기 전 나는 열흘 가까이 파리와 피레네 국립공원 근처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바욘은 피레네 국립공원으로 가기 위해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10시간 넘게 달려서 도착한 프랑스 항구도시다. 새벽에 도착해 숙소를 찾지 못해 쩔쩔맬 때 만난 사람이 그녀였다. 그 어두운 새벽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동양인 남자에게, 파리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오며 나를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40여 분간 길거리에서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그녀를 실성한 여자로 취급하고 눈이 아닌 입으로 하는 윙크나 날리다니.

그날 그녀는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숙소를 찾아 주겠다며 여기저기 벨을 눌러 물어봐 주기도 하고, 걱정스럽게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바욘에는 왜 왔냐? 혼자 온 거냐? 다음에는 어디로 가냐? 흡사 미아 찾아주기 센터의 친절한 직원 같은 그녀에게 나는 세 살박이 아동처럼 더듬거리며 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론 번역기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바욘의 교회에서 자고 여배한 다음 여기서 까미노 일정을 시작한다며 내게 꼭 생장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냐, 웬만하면 교회에서 자고 여기서 까미노를 시작하라는 취지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고 나는 고집쟁이 미아처럼 ‘피레네 국립공원에 갔다가 생장으로 가서 까미노를 시작할 거야’ 라고 계속 떼를 썼다. 결국 그녀는 교회를 향하여 새벽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두 눈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실성한 사람으로 여겼으니......

길벗들이 소포를 발송하고 자연스럽게 통역이 돼 준다. 그녀는 ‘당신들을 만났다니 정말 다행이다’ ‘언제부터 이 사람과 동행하고 있냐?’ ‘생장으로는 잘 갔더냐?’ ‘그날 새벽 정말 걱정되더라’ ‘계속 함께 다녀 줄 거냐?’ 속사포처럼 길벗들에게 물어댔다. 나는 ‘그날 새벽 당신의 인내심과 친절에 크게 감동했다’고 사의를 전했다. 또 ‘그날 어두워서 당신을 제대로 못 본 탓에 오늘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실성한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벨기에 사람이며 이름은 제네비이브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이며 실제 이름과 발음이 흡사한 ‘제이슨’이라고 영어식으로 알려줬다. 이름만은 영어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다.

내가 벨기에도 꼭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하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오는 건 환영하지만 영어를 배워서 오란다. 점심을 사겠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그녀는 표표히 도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팜플로나의 까스티요 광장 한켠에 있는 카페 이루나를 찾은 것은 늦은 점심도 점심이지만 무엇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단골 카페 이루나에 헤밍웨이의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파리의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바르, 파블로 피카소, 브리지트 바르도, 이브 몽땅 등 수많은 예술가, 사상가들의 단골 카페에도 사진 한 장 뵈지 않더니 어쩜 유럽 사람들은 이 모양이야? 헤밍웨이가 자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썼던 테이블 하나라도 전시해 놓지, 투덜거리며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카페 이루나에 헤밍웨이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 부르고스에서 만나게 되는 정진규 선생의 전언에 의해서였다. 언어가 안 되니 물어보지도 못해서 일어난 비극이자 희극이었다.

식사 자리에는 전날 수비리에서 처음 만난 대구 대봉동 성당에 적을 둔 적도 있다는 베드로 신부님도 함께했다. 신부님은 내게 ‘아무리 봐도 스님 같은데 맞으시죠?’ 거듭 물었다. 나는 거듭 ‘그렇게 보이십니까?’ 라며 웃었다. 신부님은 피레네 중턱 오리손 산장에서 1박 할 때 자기소개하는 식사 자리에서 마지못해 신부라고 공개한 것이 퍼져나가 순례길 여기저기서 빠드레, 빠드레(신부님) 한다며 마뜩잖은 듯 웃었다.

팜플로나의 밤은 더디게 익어갔다. 생장에서 함께 출발한 길벗들은 이 밤을 끝으로 해산했다. 까미노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이별하는 법이다. 까미노 이별법은 인생길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우연히 동행이 되었다가 우연히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간다. 만날 땐 ‘올라(안녕)~’하면 그만이고 헤어질 땐 ‘부엔 까미노(잘 가)~’ 하면 그뿐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처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한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어서가 아니다. 자연에 맡기고 흐름에 맡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덕이다. 그렇게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것이 까미노다. 어제까지 동행하던 사람의 알베르게 베드가 다음 날 아침 비어 있으면 먼저 떠났구나, 하면 되고 며칠 후 다시 만나면 ‘올라~’하면 되는 길, 그게 까미노다.

까미노 이정표와 고요한 숲길.
▲ 까미노 이정표와 고요한 숲길.

팜플로나에서 이틀을 묵고 처음으로 혼자 걷는 까미노는 참신하고 매력적이었다. 길벗들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역시 길은 홀로 가는 길이 최고다. 특히 까미노를 떼 지어 가는 것은 지나치게 조야하다. 까미노에 대한 모독이다. 고독과 만나지 못하면 여행이 아닌 불행이다. 인간은 고독할 때 깊어지고, 고독할 때 자신을 만난다. 까미노는 단순히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아니다.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의식이다. 함께 가면 타인이 보이고, 홀로 가면 자신이 보인다. 모든 길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모든 인생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누군가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진로를 고민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신앙심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마저 걷지 못한 구간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걷노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도 물었다. 왜 까미노를 걷냐고. 나는 이 통속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은 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답해 주었다. ‘예쁜 길이 좋아서....’ 이건 부동의 사실이자 진실이다. 나는 이번 까미노에서 내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길, 특히 개울처럼 휘돌아가는 오솔길을 좋아하는지, 왜 휴대전화에 길 사진만 편집적으로 채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글을 통해서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이자면 머릿속 안개를 걷어내고 싶었다는 것, 야고보 사도가 이 길을 걸을 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는 것, 구상하고 있는 글쓰기에 약간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 정도다.

<필자, 현각 정사 이력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소설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저서 <나마스테, 여기는 붓다의 나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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