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br></div>
 
▲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시리야, 정훈희 안개 틀어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간병인 서래(탕웨이)가 돌보는 할머니는 아이폰의 AI 음성인식 서비스 ‘시리(Siri)’를 불러 노래듣기를 즐긴다. 말 한마디에 정훈희의 ‘안개’가 촉촉하게 울려퍼진다.

한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다 곤혹을 치렀다는 아이폰 사용자들이 많았다. 비행기모드나 방해금지모드에서도 내 가방 속 아이폰의 ‘시리’가 저절로 켜지면서 또랑또랑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자기 주인의 목소리도 구분하지 못하고, 낄 데와 안 낄 데도 모르는 ‘시리’의 반응에 관객들이 함께 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할머니가 AI에게 명령한 것이 음악재생이 아닌 응급상황 알림이었다면 어땠을까? AI가 예기치 못한 오류를 일으켰을 때 너그럽게 웃고 넘어갈 수 있을까.

실제로 구급차를 호출하는 AI스피커가 시범지역에 보급되고 있고,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을 돕는 AI응급의료시스템 도입도 추진되고 있다. 사람의 일을 돕거나 대체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돌봄의 영역에서도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대구지역 노인생활지원사들의 처우개선 요구 기자회견
▲ 대구지역 노인생활지원사들의 처우개선 요구 기자회견

줄어들지 않는 돌봄 사각지대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복지 사각지대 발굴을 위해 만든 범부처 기관 ‘주민복지서비스 개편 추진단’ 활동이 지난 8월로 종료되었다. 그동안 운영된 ‘찾아가는 복지팀’ 사업은 어떠했을까?

보도에 따르면,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에 포착된 대상자 133만여 명 중 복지 서비스를 받는 경우는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찾아가는 복지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로 연결된 경우는 고작 2.1%에 그친다고 한다. 위기상황이 파악됐지만 지속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적 제도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관계를 끊고 숨어 지내는 고립 가구를 찾아내고 설득하는 것 역시 어렵다. 한두 차례의 전화와 방문으로는 닫힌 마음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사각지대는 커져가고 있었다.

정부의 결심... AI복지사

‘송파 세 모녀’ 이후 8년이 흘렀지만 ‘수원 세 모녀’로 또다시 맞닥뜨린 현실 앞에 정부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체계를 전면 점검·보완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결심은 무엇일까?

윤석열 정부 첫 예산안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올해 4억 원이었던 ‘복지 사각지대 발굴 관련’ 예산을 36억 원으로 늘렸는데, 이 중 ‘AI복지사’ 개발에 26억 4천만 원을 배정했다.

위기 가구의 초기 상담에 활용한다는 ‘AI복지사’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적은 인력으로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인건비는 줄어들겠지만,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도 열리지 않던 마음이 AI의 전화음성에 열리게 될까. 빚에 쫓겨 주소지를 옮기고 숨어버린 ‘수원 세 모녀’를 찾아내 도와줄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선다.

복지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사상 최대로 109조 원 규모 예산을 편성했다고 밝혔으나, 실상을 따지고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첫 해 보건·복지·고용예산 증가율은 4.1%로, 올해 증가율(8.5%)의 절반도 되지 않고, 역대 정부의 첫 해 보건·복지·고용예산 증가율(박근혜 정부 8.7%, 문재인 정부 12.9%)과 비교해도 초라하다.

민생 위기 상황에서 ‘건전 재정’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복지 축소를 밀어붙이는 이번 정부 예산안은 건전하기는커녕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예산 절감에 희생되는 돌봄노동자

복지 사각지대 발굴 사업의 빈약함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또 있다.

민간위탁기관에 고용되어 노인돌봄서비스를 수행하는 노인생활지원사들에게 돌봄 대상자 발굴 업무가 떠맡겨지는 것이다. 교통비와 통신비조차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우의 1년 단위 계약직인 이들은 돌보던 노인이 사망 등으로 서비스가 종결되면 대상자를 직접 발굴하라는 기관의 지시를 받기도 한다.

운영비를 벌어야하는 민간위탁기관의 속성이 제대로 된 돌봄서비스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은 차고 넘친다. 정부가 돈을 쓰지 않으려고 돌봄을 민간에 맡겨둔 결과, 돌봄노동자들은 더욱 쥐어짜이고, 돌봄서비스는 갈수록 허술해진다. 정부와 지자체가 돌봄노동자를 직접 고용해 사업을 운영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다.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겠다는 관점으로 돌봄서비스의 공공성을 높이는 것이 해답이다.

저평가된 돌봄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돌봄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조례를 준비하고 있는 지방의원들이 있다. 전라남도와 서울 노원구, 광주 서구, 전북 익산시 등에서 진보당 지방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돌봄노동자 지위향상 및 처우개선에 관한 조례’가 우리사회 돌봄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간병인 서래가 방문하는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스마트폰에 정훈희의 ‘안개’를 넣어준 것도 손녀딸 같은 간병인 서래였다.

시리는 서래의 마음을 대신할 수 없다. 돌봄노동은 AI로 대체될 수 없다.

김재연 (前 진보당 상임대표, 19대 국회의원)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