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방송 캡처
▲ MBC 방송 캡처

1. 우리나라 정부와 언론의 자유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속해왔던 출근길의 약식 기자회견을 6개월 만에 중단하였다. 사유는 11월 18일 도어스테핑 때 MBC 기자와 빚어진 불미스러운 사태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사태의 실제 원인은 지난 9월 대통령의 UN총회 참석에 따른 미국 순방 당시 MBC가 비속어 논란 사태를 촉발시켰고, 대통령실은 이를 악의적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조치의 일환으로 11월 G20 정상회의 동남아 순방 길에 오르면서 MBC 기자의 경우 대통령의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윤대통령은 2022년 취임사와 8.15경축사, 국제사회 무대에서 누누이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여 천명하여 왔다.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중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통령실이 정치적 악의를 이유로 해당 언론사를 차별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것과 언론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냐는 데 있다.

언론(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는 보수 성격의 윤석열 정부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직전 진보 성격의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러 문제 사안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으로 2021년에 민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대북전단금지법을 들 수 있다. 이 법은 탈북자 중심으로 구성된 남한 시민단체가 북한 김일성 가계의 독재 실상을 알리는 내용의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시킬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민주당은 제정 이유로 DMZ 인근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 통치자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이 사안은 국내를 넘어 국제인권단체와 미국 하원의 인권위원회에서조차 깊은 우려를 표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 사례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문정부가 2020년 말에 관철시킨 이른바 5.18역사왜곡처벌법도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과 직결되기에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2. 주요 정치철학과 언론의 자유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적 공산주의(Marxist communism)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권위주의적으로 대처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최종 목적으로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계급 사회를 청산하기 위해 여론을 적극 이용하지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걸림돌의 제거를 서슴지 않는다. 현존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의 지침에 위배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차 없는 탄압을 자행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민의 자유를 통제하는 닫힌 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지만, 욕망과 이기심을 쫓기에 언제든 사악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더군다나 힘이 집중된 사회 권력은 제도 운영에 따라 모두를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에 사회가 규범적으로 바르게 나아가려면 비판에 자유로워야 하고, 그 실현 방도가 제도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데 있으며, 그럴 때 열린사회가 된다.

현대 사회윤리는 둘이 주류였다. 하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서 행위의 도덕적 옳음을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또는 행복)이란 목적에서 찾는다. 자본주의 경제가 파이 키우는 데 주력하게 된 연유도 공리주의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칸트적 의무론(Kantian deontology)으로 인간 행위의 옳음을 보편화 가능한 도덕규칙의 의무적 준수에서 찾는다. 나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남에게도 두루 해당하기 때문에 법의 정신이 되어 대륙법의 기초가 되었다.

행복 공리주의를 주창한 밀(J.S. Mill)은 저서 <자유론(On Liberty)>에서 기념비적인 글을 남김으로써 자유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자유가 인간 의식의 내면(inward)에서 연유하기에 양심 및 사상의 자유로 부상하게 되고, 표현의 자유가 이를 드러내면서 남과 관계되기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누구나 취향에 따라 삶을 계획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를 추구하게 되기에 “우리가 동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들로부터 방해(impediment) 받지 않을” 자유를 갖는다고 여겼다. 위해(금지) 원칙에 따른 자유를 밝힌 것이다. 이로써 “그 이름에 걸맞는 유일한 자유란, 우리가 타인의 것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의 획득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추구할 자유이다”고 선언하였다.

칸트적 의무론에 의거하는 표현의 자유는 이성을 지닌 개인의 권리로 부상한다. 칸트에게는 누군가 나에게 “S라는 상황에서 X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할 터이다. 결국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이와 같은 보편적 규칙(도덕과 법 규범)을 의무로 준수해야 한다. 통상 권리는 의무와 상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자유주의자 칸트에게 표현의 자유는 개인이 누릴 권리가 된다.

밀의 자유주의는 간섭(또는 방해) 받지 않을 자유에 방점이 찍힘으로써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와 궁합을 맞추게 되어 자유방임주의(현대 자유지상주의)를 낳는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는 개인의 자유가 만개되도록 하되, 정부는 그것이 방해 받지 않도록 최소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칸트의 자유주의는 존 롤스(John Rawls)에 의해 권리 체계에 따른 정의론으로 구체화됨으로써 평등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ism)를 출현시킨다. 롤스는 먼저 기본적 자유에 대한 권리가 누구나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고, 다음으로 공정한 조건 하에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보장되는 사회제도를 기획한다. 이로써 각 개인은 합리적 권리에 따라 다양한 조건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할 자유를 폭 넓게 갖추는 사회를 만나게 된다. 미국에서 자유지상주의는 보수로, 평등적 자유주의는 진보 정책으로 구현된다. 서유럽에서는 자유주의가 보수로, 사민주의가 진보로 실현된다. 이때 전후의 사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를 존중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때문에 평등적 자유주의와 호혜적 관계로서 권리를 중시하는 체계를 갖춘다. 표현의 자유는 바로 그런 권리 가운데 중요한 하나이다.

3. 공화주의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성찰

현대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20세기 말에 새롭게 부활한 사조인데,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도 이를 소환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고대 그리스 사상과 로마의 공화정, 그리고 미국 건국의 공화주의를 발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공화주의 이론의 핵심은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자치는 시민의 덕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 만일 덕 없이는 자유가 존재할 수 없고 덕은 언제나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면, 공화주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시민들의 도덕적 인격을 형성 내지 향상시키고 공동선에 대한 애착을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의 제도와 정책은 건국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공화주의에 근거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조 양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대규모 제조업의 등장에 따라 상업주의가 만연하면서 주된 기조가 자유주의로 바뀌기 시작했다. 공화주의의 내용은 점차 실종되고 형식적 절차만 남게 됨으로써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 양상과 정부 입장도 달라져갔다.

1860년대 초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더글러스(S. Douglas)는 노예제에 대한 남북의 선호가 상반되므로 정부는 도덕성 판단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공화당의 후보 링컨(A. Lincoln)은 노예제가 악하므로 정부가 도덕적 판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였고, 링컨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1776년 독립선언에 이어 1787년 연방헌법의 제정, 1865년 남북전쟁의 북부 승리, 그리고 이후 얼마 동안은 공화주의가 대세였다.

시대 흐름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세기 초 대법원장 로크너(Lochner)의 연방대법원 시기에서 비롯된다. 1905년의 ‘로크너 대 뉴욕 주 사건’이 대표적이다. 주는 제빵공장 노동자의 근무가 혹독하다고 판단하여 주 6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연방대법원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계약에 따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주의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맹렬하게 타오르던 19세기 말부터 이를 대변하여 상업주의에 따른 계약의 자유를 보호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개별 주가 제정한 법률 대부분을 위헌으로 판정하였다. 이런 흐름은 대공황을 극복하려는 루스벨트(F. Roosevelt) 대통령과 충돌을 빚음으로써 제동이 걸린다. 그리고 1937년에 여성에 대한 최저임금법을 지지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자유방임주의가 누리던 특권적 지위가 퇴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 사회가 목적하는 바의 공동선은 외면당하고 오직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게 됨으로써 대법원과 정부는 개개인의 좋음(선)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게 엇갈리므로 중립성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데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입장은 주류 흐름을 뒤쫓는 형세였다. 연방대법원은 1942년에 채플린스키라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사건을 다루면서 그가 경찰서장을 향해 ‘벼락 맞을 파시스트’와 같은 모욕적 발언을 함으로써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심리하였다. 여기서 표현에는 추잡하고 음란하며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저급한 가치에 해당하는 발언의 경우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고자 한 자유의 가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런 발언 자체만으로도 위해를 주어 싸움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확정하였다. 이 판결은 공화주의의 도덕성 평가를 바탕으로 하면서 동시에 밀의 위해(금지) 원칙에 대한 위반을 근거로 내린 것이었다.

채플린스키 사건은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밀의 원칙에 따라 인정한 것인데,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문제꺼리가 되었다. 두 사건을 들 수 있다. 한 사건은 1970년대에 벌어졌는데, 스코키 시의 한 마을에 홀로코스트 비극서 가까스로 생존한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신나치의 시위가 이곳서 도발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이었다. 시는 주민 토론을 토대로 신나치의 시위를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하였는데,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이름으로 연방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에 벌어진 것으로 인디애나폴리스 시는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시민적 평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포르노를 제한하는 조례를 제정하였고, 역시 표현의 자유 위축이라는 이름하에 쟁점이 되었던 사건이다. 이에 연방대법원은 두 시의 조례가 모두 특정한 도덕 판단을 내림으로써 선에 대한 정부의 중립성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샌델은 연방대법원의 두 판결이 자유주의 인간상, 즉 인간을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로 보는 견해를 반영하여 내린 잘못된 결정이라고 본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밀의 언급처럼 표현상의 실질적 피해가 없도록 개인의 명예훼손을 인정하면서, 개인이 아닌 집단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취해진 것이라 파악하였다. 샌델은 인간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즉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체득하는 연계적 자아라는 것과, 그럼으로써 자유로운 인간이 덕을 갖추어 자치 역량을 키우면서 공동선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몹시 중시하되, 피해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에게도 심각한 수준에 달했을 경우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4. 우리나라 정부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성찰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열린사회의 첩경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서 시작하므로 지극히 중시되어야 한다. 물론 밀이 위해 원칙으로 언급한 것처럼, 타인에게 실질적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다만 표현의 자유가 공익(또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때는 일부 개인에게 불쾌감 등의 피해를 준다고 해도 이는 감수할 사안이다. 또한 샌델의 공화주의에 따를 때 집단에게 가하는 표현이 도를 넘어 사악한 것일 경우, 개인이 입는 피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규제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5.18역사왜곡처벌법의 경우 일부 역사왜곡의 표현이 피해자 집단에게 가하는 극심한 해악으로 인해 명예훼손의 금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제정의 정당성은 연계적 자아의 인간상에 따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국식 자유주의는 스코키 판결에 비추어볼 때 이 법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정부의 민주당이 제정한 대북전단금지법은 자유주의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고, 공화주의 관점에서도 인민의 자유와 공동선을 위해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이기에 정당하지 않으며, 이로써 위헌 소지가 크다고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뉴욕 UN총회 방문 때 행한 사담을 공개적으로 퍼뜨린 MBC의 보도는 천착할 필요가 있는데, (표현의) 자유와 시민의 미덕, 공익(또는 공동선)을 함께 중시하는 공화주의 관점에서 평가를 하고자 한다. 그 말은 “국회에서 이 xx”라는 비속어를 담고 있는데, 공개 석상의 발언이 아니라 걸으면서 옆 사람에게 가볍게 행한(혼잣말 속성도 있는) 사담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비속어의 대상이 국회라는 데 있지만, 또한 MBC가 문장의 발음과 의미가 모호하여 특정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의회를 겨냥한 것으로 몰아가면서 국내외로 널리 전파한 데 있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외교 사안에 대해서는 국익도 적지 않게 고려해야 함에도, MBC의 보도는 작은 흠결을 빌미로 나라 위한 외교를 훼손시킨 행위(예컨대 한미 간의 이간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취해질 마땅한 조치는 윤대통령의 경우 국회 향해 비속어 표현을 쓴 데 대해 무안해하며(?) 사과를 하면 될 사소한 사안이고, MBC의 보도는 표현의 자유라 해도 국익을 저해한 중대 사안에 해당하므로 국민을 향하여 석고대죄 하듯이 사과를 했어야 한다.

적시에 소모적이지 않게 처리될 일인데도 서로 적정한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사태가 커진 점은 염려스럽다.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해당 기자의 탑승을 불허한 조치는 옹졸한 조치이다. 언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언론계 자체를 통해 정화되도록 유도하고, 정책적 조치는 지극히 미흡할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통치자가 장막 뒤에 숨기보다는 전면에 나서는 것이 열린사회를 확고히 하는 것이므로 중단된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이 빠른 시일 내에 재개되고, 이와 더불어 표현의 자유도 건강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면희

현재 21세기공화주의클럽 상임대표이고 성균관대 초빙교수
전 창조한국당 대표(비대위원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전 녹색대학 대표, (사)환경정의 연구소장,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위원장
저서로 <초록문명론> , <미래세대와 생태윤리>, <제3정치 콘서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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