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패배, 노선만의 문제 아니다. 사람, 행태, 신뢰의 문제 정당정치에서 중요한 변수”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가 10월 26일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개혁적 중도보수정책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민과 중산층의 고통을 줄이고 복지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되었으며, 한나라당이 이 과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한나라당 개혁 플랜(plan)'으로 만들어 내년 3월까지 국민 앞에 내놓겠다고 했다.

민주당의 진보에 이은 한나라당의 개혁적 중도보수, 모두 서민의 삶과 복지를 이 시대의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바람직한 현실 인식이다. 어떻게 지속되고 구체화될지 지켜볼 문제이다.

안 대표는 정치권이 서민과 중산층의 삶, 특히 서민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중도 가치’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물론 한나라당에서 친서민, 중도 담론은 이미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의 8.15경축사 이래 일상화됐다. 7월 전당 대회 이후에는 당내에 서민정책특별위원회까지 구성해 가동하고 있다. 중산층과 서민의 당, 중도개혁을 표방해 왔던 민주당보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서민과 중도를 더 내세웠다.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서민 구호는 그 동안 서민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나라당의 실상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집권 초부터 형성된 강부자, 고소영 정부라는 이미지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자금 대출, 보금자리 주택, 대기업·중소기업 사장 간담회 등 몇 개의 서민정책 이벤트는 있었지만, 국정 기조의 변화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안 대표의 연설을 두고도 진보신당 등 야당에서는 반성 없이 기만하는 ‘구호만 요란한 말잔치’라고 비난했다.

안 대표는 달라진 시대의 패러다임을 직시해야 하며, 당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자기 쇄신을 강조했다.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요청했다. 북한과의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바로 없던 일처럼 되고 있지만, 정두언 최고위원의 ‘부자감세 계획 철회’ 제안도 한나라당의 노선 변화 분위기를 거들었다.

사실 ‘개혁적 중도보수’는 민주당의 이념 지표였다가 얼마 전 삭제한 ‘중도개혁’을 한나라당이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중도개혁과 개혁적 중도보수는 조금 다르다. 중도개혁은 중도+온건진보를 뜻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보수 한나라당 세력과 구분되는 상대적인 진보 노선이었지만, 진보에 대한 급진적 이미지, ‘빨갱이’ 등의 편견을 피하고자 개혁이라는 용어를 쓴 측면도 있었다.

반면에 개혁적 중도보수는 기존의 보수 기반을 토대로 중도로 확장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는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안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그 동안 너무 보수에 치우쳤고, 더구나 이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수의 끈을 놓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의 합리적 보수, 건강한 보수 개념을 개혁적 중도보수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쓰고 있다.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치와 정당도 현실에 대한 재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자명하다. 과거의 진보적 의제들이 이제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서민의 삶과 복지는 우리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의제이다. 복지의 주요 의제인 교육, 의료, 주거, 노후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과제들이다. 따라서 보수당이었던 한나라당까지도 이런 문제를 시대적인 과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노선과 차별을 두려고 하면서도 ‘선별적 복지’ 대상을 70%까지 확장해 적용하는 복지정책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최근 우리 정당들의 이념 지형이 진보 쪽으로 조금 이동하고 있으며, 그 진보가 새로운 중도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제 진보의 길이 새로운 중도의 길일 수 있다. 과거 진보정당과 보수정당과의 갭도 조금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기존 진보정당이 원내진출 전략에 맞춰 대중정당화 된 영향도 있지만, 거대정당들이 복지 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진보정당 의제들을 수렴한 결과이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 최근 진보정당들과의 연합정치 과정에서 무상급식을 비롯해 진보적 과제들을 많이 흡수했다.

그동안 야당의 진보 노선을 ‘좌익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던 한나라당도 이제 시대적인 과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도 차기 대권 후보도 아닌 안상수 대표가 주도한 ‘개혁적 중도보수’ 선언이 얼마나 힘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나라당의 변화 기세에 힘을 보탰던 ‘감세 계획 철회’ 제안도 다시 원점에서 돌고 있다. 청와대의 대북 전략은 대표 연설의 기조변화 검토 요청에도 불구하고 바뀔 것 같지 않다. 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또 다른 요소인 당의 역사성, 인적 구성 등은 여전히 보수적 기조가 압도하고 있는 당의 구조도 한계이다.

이런 정체성 재편 논란 와중에 10.27 재보선이 치러졌다. 거대 집권여당 한나라당은 7.28 재보선에 이어 다시 승리하면서 6.2 지방선거 참패 이후 회복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진보를 강조하면서 조금 기세가 살아나는 것 같던 민주당은 광주에서 민주화 이후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노선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아서일까? 노선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 행태, 신뢰의 문제는 향후 정당정치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김만흠(金萬欽) 폴리뉴스 칼럼니스트

-서울대 정치학과 및 대학원 졸(정치학 박사)
-가톨릭대 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역임
-현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
-현 CBS 객원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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