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그림, 붓 터치 보면 술 취해서 그린 그림 절대 아니다
단지 유명하고 비싼 게 아니라 굉장히 밀도 있고 퀄리티 높아
형태가 아니라 느낌과 기분, 즉 작가의 해석 극대화한 현대미술의 초석
네덜란드는 한국과 역사·지리적 정체성 유사…배경 알면 고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것
지난 20일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열다섯 번째 강의는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주제로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맡았다.
양정무 교수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이자 한국예술연구소 소장이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 다양한 대중 강연과 학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 『상인과 미술』, 『그림값의 비밀』 등이 있다.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
제가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너무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이다.
지난 겨울방학에 2주 넘는 일정으로 북유럽 미술을 공부하러 갔다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뮤지엄에 다녀왔다. 고흐의 작품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모여있는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장권은 3만원 정도 되는데 오픈 시간부터 인파가 한없이 몰려든다. 티켓팅을 시간대별로 하고 관객수도 제한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하기는 힘들다. 오늘은 편히 앉아서 반 고흐의 삶도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감상하시기 바란다.
반 고흐 미술관 바로 옆에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대가 17세기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있다. 고흐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회화적으로 굉장히 재능이 많은 지역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에는 네덜란드의 전통에서 이어지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15세기 얀 반 에이크(Jan van Eych), 17세기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9세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여기서 반(van)은 ‘~에서 왔다’라는 뜻이다. 즉, 에이크에서 온 얀, 레인에서 온 렘브란트, 고흐라는 곳에서 온 빈센트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것이 풍차다. 풍차는 단지 낭만적이고 민속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 지역은 30%가 해수면보다 낮다. 여기에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간척해 땅을 만들었는데 항시적으로 배수를 하지 않으면 땅이 존재하지 않는 저지대(Lowland)다. 굉장히 습하다. 풍차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수 처리 기능을 갖추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네덜란드인들이 도전해 얻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중심인 암스테르담은 ‘북유럽의 베니스’라고도 한다. 주 도로가 대부분 운하로 되어 있는 독특한 환경의 도시다. 암스텔 강이 흐르고 거기에 댐을 만들어서 암스테르담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 중심지 외곽에 반 고흐 미술관, 국립 미술관, 시립 미술관, 보석 미술관 등 19세기 초부터 집중적으로 문화예술중심센터를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은 또 자전거가 엄청나게 많다. 차보다는 배나 자전거로 다니는 사람이 많고, 자전거 길과 일반 도로, 인도가 구분이 잘 안된다. 자전거 5천대를 넣을 수 있는 세계 최대 자전거 게라지(주차장)가 있다. 가히 자전거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간척지이기 때문에 산이 없고 평지라 자전거가 달리기 참 좋은 곳이다. 호텔에서도 대부분 자전거를 대여 해준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분단국가 중 하나다. 남쪽 벨기에와 북쪽 네덜란드가 원래는 한 국가였는데 17세기에 완전히 갈라서면서 두개의 국가가 되었다. 주변국을 살펴보면 바다 건너 영국, 바로 아래 프랑스, 뒤에는 독일 등 유럽 강국들 사이에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리고 스페인의 강한 지배를 받았던 곳이다.
1609년 지도를 보면 종교전쟁으로 남쪽 가톨릭, 북쪽 개신교(Protestant)로 나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때 두 지역이 통일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지만 2백년 정도 따로 살았기 때문에 굳이 합칠 이유가 없었다. 우리나라도 분단 70년이 됐다. 두 세대 더 넘어가면 합칠래야 합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네덜란드사를 공부하려고 책을 구했는데 국내에는 네덜란드史 책이 한권도 없었다.
이렇게 분리되었을 때 남쪽(미술)의 거장이 바로 루벤스(Peter Paul Rubens)이다. <플란다스의 개>라는 일본 만화영화의 꼬마 주인공 꿈이 화가였는데 꼬마가 평생 보고 싶어한 그림이 바로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이었다. 플란다스는 네덜란드의 한 지역으로 회화적 전통이 굉장히 강한 곳이다. 그 윗동네에는 한 세대 정도 나이는 어리지만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있었다. 서양 미술사에 길이 남을 두 화가가 네덜란드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Leo Belgicvs>라는 지도가 있다. 자신들이 작지만 유럽의 사자라고 생각해 지도를 사자모양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바로 한국의 호랑이 지도다. 소위 강소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냈다. 벨기에 1천만, 네덜란드 2천만 합치면 3천만으로 유럽에서 그렇게 작은 나라는 아니다. 두 나라가 강대국 안에서 문화적 정체성과 언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시리즈 영화에 나오는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을 아는가? 원래 오페라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바다의 저주를 받아 10년에 한번 육지에 내리는데 이때 참 사랑을 얻지 못하면 또다시 10년을 떠돌아야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기본적으로 먹고 살 것이 없어 바다로 나갔다. ‘1백만은 땅에 있고, 2백만은 바다에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교역과 무역을 통해서 먹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방랑벽이나 방황벽이 많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데 거부감이 없다.
제가 보기에 고흐 역시 플라잉 더치맨이었다. 고흐의 국적이 왜 이렇게 헷갈리나 생각해보니 태어나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청년기 때는 영국에서 꽤 오랜 기간 살았고, 본격적으로 작업할 때는 프랑스에 있었다. 나중에는 남부 프랑스까지 가서 결국 프랑스에서 죽는다. 굉장히 다양한 국적을 오가지만 이런 것이 네덜란드 사람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시골 조그만 마을의 목사였다. 작은 아버지는 화랑을 운영하는 아트 딜러였다. 고흐는 그림도 늦게 시작했고 미술의 끈도 없이 혼자 고독하게 그림 그리다가 죽었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술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계기는 굉장히 많았다. 특히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안 나왔지만 그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고흐는 삼촌 갤러리에서 아트 딜러 역할을 했다.
고흐는 벨기에에서도 살았다. 여기서는 탄광지역에서 목회하며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7,8세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30대 초반 입신작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들과 상당히 유사한데, 시커멓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탄광지역의 한 가족이 감자로 식사하는 모습을 정감있게 그려냈다. 이 그림은 반 고흐 미술관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사이즈가 결코 작지 않다.
반 고흐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또 하나가 편지다. 이 사람은 굉장히 많은 편지를 썼다. 자신의 일생을 거의 일기 쓰듯이 동생과 가족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는데 이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편지에는 내가 왜 이 그림을 그렸고,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간단한 스케치와 함께 그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서 보냈다.
반 고흐는 그림을 정식 미술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롤모델로 삼은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밀레(Jean-François Millet)다. 왼쪽이 밀레의 그림이고, 오른쪽이 고흐가 카피한 그림인데 색감을 많이 입혔다. 처음에는 어둡고 무거운 무채색의 그림을 그리다가 파리에서 1~2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아는 화려한 색감으로 바뀌게 된다.
파리로 가게 된 이유는 형제애가 상당히 좋았던 동생 테오(Theo van Gogh)가 파리에서 성공한 아트 딜러였기 때문이다. 동생의 지원을 받아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동생이 많이 팔아주면 경제적으로 안정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파리에 갔을 때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이 메인 스트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작가들은 그림을 밖에서는 대충 그리고 스튜디오에 가져와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교본 대로 그렸는데 파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작가들은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완성시키면서 현장감을 극도로 부각시킨다. 그러다 보니 붓 터치도 굉장히 활발하고 색감도 강렬한 그림을 그렸다. 모네(Claude Monet)는 해 뜨는 인상을 담은 <인상, 일출>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들의 이름은 인상파가 되었다.
고흐는 파리에서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하는 화가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 동생 테오가 그런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고흐가 네덜란드에 계속 있었으면 어두운 그림을 계속 그렸을 것이고, 아마 우리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화가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과 도전에 의해서 변화한 모습, 그리고 시대의 주류에 동참하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반 고흐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고흐는 일본을 좋아했다. 당시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해서 일본을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일본의 강렬한 색채가 대비되는 판화를 우끼요에(浮世絵)라고 하는데 그것을 반 고흐가 카피해 그린 그림이다. 오른쪽 그림은 물감상이던 탕기 영감인데 물감뿐 아니라 새로운 문물을 많이 접해서 뒤에 일본에서 온 회화나 판화들이 많이 걸려있다. 고흐는 이런 강렬한 색채들로 표현되는 일본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나라일 거라 생각하면서 우울한 북유럽을 떠나 밝고 명랑한 일본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못 가고 남부 프랑스로 가게 된다. 건강이 너무 안좋아서 먼 여행을 할 수 없었고, 최대한 남쪽으로 가겠다고 해서 남부 프랑스 아를(Arles)로 가게 된다. 여기서 유명한 반 고흐의 아를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린 그림들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반 고흐의 명작들이다. 여기서 건강은 나빠졌지만 화가로서 그림은 굉장히 좋아지게 된다.
아를에서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은 없어지고 안내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거기서 1888년 5월 1일부터 1년 1개월 정도 살았다. <아를르의 방>은 편지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번 그림은 나의 방이야. 여기서는 색채가 모든 것을 지배해”
색채가 굉장히 강렬하다. 실제로 그렇게 생겨서가 아니라 이 방이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한다. “벽은 창백한 보라색이다.” 여기서 미술의 반전이 일어난다. 형태를 그리는게 아니라 ‘나의 느낌과 기분’을 그린다.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서 만들어지게 된다. 또 중요한 것은 이것을 스스로 글로 남기면서 정당화하고, 비평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고 우편배달부의 초상화도 그려줬다. 동생이 계속 생활비를 보내주기 때문에 편지를 계속 보낸다. 약 600여통을 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어로 쓰다가 막판에는 불어로 썼다. (여담이지만) 네덜란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랭귀지 잘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살다 보니까 영어와 불어를 능수능란하게 한다.
이 그림은 빨강, 노랑, 초록… 일반적인 회화에서는 쓸 수 없는 보색의 대비이다. 단순히 이렇게 보이는게 아니라, “12시 넘은 술집의 끈적끈적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조합이 더 적절하지 않겠나?” 하는 편지를 남긴다. 즉, 분위기 자체의 묘사보다는 그 분위기가 나한테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에 포인트를 두고 작업을 했다. 어떻게 보면 반 고흐가 작가의 해석을 극대화하는 현대미술의 도전의 역사에 초석을 놓은 작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과 같은 그림이 아니라 내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라고 이야기했고, 실제로 그림에서 그런 부분들이 읽힌다.
<해바라기>다. 가난한 화가들은 모델을 살 돈이 없어서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해바라기를 화병에 꽂아 시간대별로 변해가는 모습을 9컷 연속해서 그렸다. 노란색 톤도 있지만 파란색 톤도 있다. 네덜란드는 17세기부터 꽃그림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라 종교화를 그리지 않았는데, 종교화의 명상과 묵상의 의미를 꽃그림을 통해서 담아낸다. 라틴어로 바니타스(Vanitas)라고 하는데 인생 찰나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죽음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그림을 사용했다. 이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해바라기도 단지 아름답고 밝은 그림만은 아니다.
아를에서의 일화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니까 시간이 안가고 재미가 없었던 고흐가 파리에서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를 부르게 된다. 선배쯤 되는 연배에 자기와 비슷하게 대학은 안 나왔지만 늦깎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 고갱(Paul Gauguin)이다. 고흐는 자기처럼 그림을 늦게 시작한 고갱에 대해 애정이 있었고 친해지고 싶어했다. 물론 고갱 뿐 아니라 여러 화가들에게 아를에 내려와 새로운 세계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돈이 궁하던 고갱만 왔다.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둘이서 거의 석 달 정도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개성 강한 두 화가가 잘 지낼 리 없었다. 알려진 대로 불꽃 튀는 격랑의 시간을 갖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 고갱은 자아(ego)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자기 스스로를 신적이라고 여겼다. 이런 두 작가가 만났으니 격렬하게 싸웠고 고흐는 크리스마스 전전날 발작하면서 자기 귀를 면도날로 자르게 된다. 이때 고갱은 깜짝 놀라 파리로 돌아가면서 태오에게 형 상태가 안좋다고 편지했다. 발작에서 벗어난 고흐는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생 레미(Saint-Rémy) 정신병원에 스스로 가게 된다. 병원 한 켠에 병원장이 스튜디오를 마련해줘서 여기서도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한다. 별이 쏟아질 듯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은 동트는 하늘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교회의 첨탑 등 원래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훨씬 더 강렬하게 표현했다. AI가 반 고흐의 그림을 분석해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을 봤는데 저는 그걸 보고 아직은 걱정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5살 청년이 정신병원에서 새벽 별빛을 보고 느낀 느낌을 AI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한국에도 비슷한 그림이 있다. 김환기 작가가 1970년대 뉴욕에서 그린 그림인데 하나하나가 별이라고 보면 되고,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것은 시인 김광섭이 지은 ‘저녁에’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1980년대 유심초의 노래도 떠오른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노래한 Don Mclean의 <빈센트>처럼 김환기 작가의 작품도 시와 노래가 있다.
https://youtu.be/oxHnRfhDmrk
https://youtu.be/Dmg2-Yit6c0
반 고흐의 그림은 붓 터치가 굉장히 강렬하다. 만만한 그림들이 아니다. 굉장히 밀도 있고 디테일이 좋다. 단지 유명하고 비싼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의 퀄리티가 상당히 높다. 붓 터치를 보면 작가의 센스나 감각들을 볼 수 있는데 네덜란드 그림들이 디테일이 좋다. 반 고흐는 이런 디테일의 혁신적 계승자라고 볼 수 있다.
반 고흐는 마지막에 너무 몸이 안좋아서 파리로 왔다가 파리 근교에서 조금 유명한 가셰(Paul Gachet) 박사에게 가서 치료와 요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의사의 모습 치고는 이 사람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고흐 편지에 보면 “나보다 상태가 더 안좋다”라고 씌어 있다.
고흐는 어떤 병을 앓았을까? 공식적으로는 간질로 되어 있다. 가셰 박사는 시야가 모두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으로 추정된다. 고흐는 이 외에도 다양한 병을 앓지 않았냐는 추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시 화가들이 많이 마시던 압셍트(absinthe)라는 술에 중독되었다는 설이 다. 그런데 붓 터치를 보면 술 취해서 그린 그림이 절대 아니다. 이런 추측들이 몇가지 징후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고흐는 37살 매우 짧은 생애를 살았고 유화를 800점 정도 남겼는데 그중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들은 마지막 3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정말 불꽃같이 그림을 그리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마술 같은 인생의 반전이 나온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87년에 현재 가치로 약 900억원 정도에 팔렸다. 작은 드로잉 하나에 60억, 우체부 그림이 1200억, 꽃그림이 1200억, 가셰박사 그림이 1600억인데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일본 뱅커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동생의 부인인 제수씨를 잘 만났다. 그녀는 두 형제가 나눴던 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아주버니의 그림도 버리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좋은 전시회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매니지먼트를 기가 막히게 한 거다. 서간집도 책으로 프린트했다. 그녀가 살았던 집에는 고흐의 그림들이 다 걸려있었다. 가장 좋은 그림 보관 방법은 걸어놓는 것이다. 이 그림의 상당수가 반 고흐 뮤지엄으로 갔다. 결국 사후 관리를 굉장히 잘해서 (고흐가 유명해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동생 테오의 부인이었던 여인, 요한나(Johanna van Gogh-Bonger)였다.
마지막 절명작은 밀밭에 까마귀 떼가 날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리고 권총자살시도를 했고, 그 상처 후유증으로 3일만에 죽게 된다. 고흐의 동생도 얼마 안 있어서 죽는다. 이들은 각자 묻혔다가 지금은 같이 묻혀있다. 사람들은 해바라기로 헌화한다.
반 고흐 뮤지엄 2017년 애뉴얼 리포트를 보니까 자랑스럽게도 관람객 순위 10위가 한국인이었다. 12위인 일본보다도 앞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흐에 상당한 관심도가 있다는 것을 저 데이터를 보고 알았다. 우리 보다 더 고흐 그림에 열광했던 나라가 일본이다. 중국에는 반 고흐 그림만 전문적으로 그리는 도시도 있다. 홍콩 근처 마을 전체가 유화촌인데 대부분 반 고흐의 그림을 카피해서 싸게는 5만원, 비싸면 30만원 정도로 판다. 질감 있는 유화 카피로 그냥 프린트 카피와는 질이 다르다.
제 생각에 한국인이 고흐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그림이 정말 강렬하다. 여타 인상파 그림들보다 더 강렬하다. 색채의 강렬함도 있지만 마띠에르(matière)라고 하는 질감의 강렬함이 있다. 또 그림이 딱 추상과 구상화의 사이에 있다. 즉 너무 어렵지 않고 꽃그림처럼 부담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기가 좋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추천하는 책이 한권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이라는 책인데 암스테르담의 역사뿐 아니라 이모저모가 나오는 책이다.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는 국가적인 정체성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사적인 유사점이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관계는 굉장히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교류할 것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림도 좋지만 우리와 통하는 부분도 많고, 히딩크 감독도 굉장히 좋아한다. 한국에서 반 고흐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 [동국대 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박원순 “세계적인 환경보호도시 만들겠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⑱강] 박원순 “시장이 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것”
- 손학규, 윤리위원장 교체 요구 거부 “최고위가 윤리위 독립성 흔들어...깊은 유감”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프로그램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⑭강] 신병주, “모든 대통령이 정조나 세종을 닮아가려고 노력한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 과정 8기 ⑫강] 심상정 "거대양당 기득권·특권 정당, 개혁 위해 정당 물갈이 필요"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⑬강] 유승찬, “인류의 지속가능한 모델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지 스스로 질문 던져야 하는 시대”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 과정 8기 ⑪강] 오건호 “한국 복지에서 중요한 것은 다수의 지지 확보”··· “제도 시행 및 시행착오를 통한 제도 개선을 위해 꼭 필요”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⑩강] 박용진 “시장경제 본연 가치 어긋나는 삼성 무소불위 견제”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⑧강] 이혜훈 “소득주도성장이 고용참사·양극화심화·투자부진 불러왔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⑨강] 윤희정 “공감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리더의 스피치"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⑦강] 박지원 “DJ, 미국에 우리 숨소리까지 다 가르쳐 줘야”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⑥강] 안병진 “정치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⑤강] 박명호 “내년 총선, 文정부 중간 평가 성격 불가피”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④강] 강형기 “리더십의 요체는 목표설정, 솔선수범, 책임감, (경제)사전예측, 휴머니티에 있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②강] 배종찬 "여론조사도 거시적인(MACRO) 분석 아닌 미세하고(MICRO) 과학적 분석 중요"
- 동국대 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YIP와 업무협약식 가져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3강] 박광온 ② “4·3 보궐 결과 엄중히 받아들여...더 치열하게 해나갈 것”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3강] 박광온 ①“허위조작정보의 해결 주체는 결국 ‘언론’”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①강] 정우택 “변화가 기회입니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제8기 리더십 최고위과정 입학식 1일 개최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㉑강] 이금룡 “제4의 물결은 상상력의 개념 설계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⑲강] 김능구 “물밑에선 2022년 대선 경쟁 본격화됐다”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⑳강] 김부겸 “양극화 해소하고 공정과 상생으로 나아가야”
- 바른미래 최고위, 11일 만의 정상화...‘손학규 사퇴’로 후폭풍 여전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㉒강] 최창섭 “철학적 사색 통해 미디어의 내적통제와 시민들의 공적통제 역량 키워야”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졸업 공연] “세대간의 벽을 넘어서”
-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졸업식 성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