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월 29일 당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를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당사에서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인터뷰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진행했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인터뷰 인물은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다.1980년대 서울·인천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현장에 뛰어든 이후 평생을 노동·진보 정치운동에 몸담은 그는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대한민국의 노동·진보정치를 ‘대중정치시대’로 이끈 주역이다.노 대표는 1987년 인민노련(인천지역민
폴리뉴스가 의 여덟 번째로 인터뷰에 모신 분은 전 민주당 대표를 역임하신 정대철 전 의원이다. 정대철 대표는 1977년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 34세의 약관에 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5선 의원을 지냈다. 선친 정일형 박사는 8선 국회의원을 지낸 한국 헌정사의 산 증인이셨고 모친 이태영 여사는 한국 여성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부친 정일형 박사가 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대통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인연 등으로 정대철 대표는 오랫동안 DJ와 정치적 고락을 함께 나누었고 노무현 전
인터뷰 중에 생각에 잠긴 김근태 전 의장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일곱 번 째 인터뷰 인물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인터부 2부 순서이다. 지난 1부에서는 김 전 의장의 민주화운동 참여 계기와 재야활동, 정계입문, 수평적 정권교체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번 2부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실패,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소회, 민주당의 진로, 10월 재선거에 대한 입장,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 등 정국 현안에 대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을 시작하며...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
지난 7월 30일 창간 9주년 기획으로 마련한 특별프로젝트 에 한화갑 전 민주당대표를 초대하여 인터뷰를 가졌다.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소위 POST DJ시대를 이끌어 갈 정치인에 대해서 대중의 눈이 쏠리고 있다. 한 전 대표는 스스로 밝혔듯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곧 DJ라 말할 정도로 DJ와 한화갑은 공동운명체와 같다. 본 인터뷰에는 포스트 DJ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에 한명인 한 전 대표가 생각하는 한국정치와 정당사,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 앞으로 정치 비전이 담겨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다섯번째 인터뷰 인물 이신범 전 의원 대표 인터뷰 전문③으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19.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걸어왔는데 연말연시 국회 입법전쟁에 대해 한 분이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는 것은 여야 어느당이든 잘못된 행위다, 본회의장은 막은 민주당도 잘못됐지만 통외통위를 막은 한나라당도 잘못된것이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그거는 맞는 말씀이죠. 다만 이제 저는 어떤걸 문제삼느냐면 첫째는 국회의원 아닌 사람이 보좌관이나 당직자들이 본회의장 출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다섯번째 인터뷰 인물 이신범 전 의원 대표 인터뷰 전문②으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10. 3당합당때 민자당에 안들어갔는데 그때 상황을 설명해달라그렇죠. 그게 90년 1월이죠. 1월 한 19일인가 20일경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 며칠전에 상도동에 제가 정책실에 17명의 전문위원을 공채를 해서 데리고서 청문회도 뒷바라지 하고 입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민주당이 상당히 그점에서 점수를 많이 땄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총재께서 저를 참 신임하고 이렇게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다섯번째 인터뷰 인물 이신범 전 의원 대표 인터뷰 전문①으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1. 이신범 의원은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특히 1980년 신군부 시절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비화를 말해달라. (이때 정계에 들어왔을땐가)아니죠. 복학생일때죠. 서울대학교 제적당했다가 71년도에 서울법대 제명당했다가 80년 3월에 형식상 복학이 됐는데 물론 지명수배 상태기 때문에 등교는 못했지만 복학생신분이었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네 번째 인터뷰 인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③으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진보정당 하기가 초보다 환경은 좋아졌죠?)그렇습니다. 예.(분단 콤플렉스, 레드 콤플렉스를 이야기 많이 하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극복된 것 아닌가하는데, 현장에선 어떤가요?)예. 제가 뭐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분단문제나 이념문제가 큰 장벽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분단도 겪지 않았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던 다른 나라에 비해서 똑같다고 얘기할 순 없겠죠.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네 번째 인터뷰 인물은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다.1980년대 서울·인천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현장에 뛰어든 이후 평생을 노동·진보 정치운동에 몸담은 그는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대한민국의 노동·진보정치를 ‘대중정치시대’로 이끈 주역이다.노 대표는 1987년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 멤버였으며, 이듬해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만기 출소하던 92년, 백기완 대통령 선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또,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네 번째 인터뷰 인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②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12. 당시에 보면 굉장히 일사분란하고 하나로 모여서 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그런 분열이 그때부터 혹시 싹이 트고 있었나, 당 운영에 있어서...뭐 운영방식의 문제라고 생각되진 않고요. 당시 제가 사무총장이었고 선거대책본부장이었습니다. 사실은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제가 초창기에 부대표였는데 2002년 정기당대회에서 제가 사무총장이 됐고 사실 제가 사무총장이 된 것은 2
ⓒ폴리뉴스인터뷰를 마치고서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이것들을 덧붙이는 글로 남겨야 나 자신도 객관성을 유지했다는 자위를 느낄 수 있을 성싶다.나는 이 인터뷰에서 DJ와 YS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그들이 재야민주화운동세력과 연대하고 함께 민주화운동을 벌였는데도 말이다. YS도 초산테러를 당했다든가 야당총재로서 김일성과의 남북협상회담을 제안하여 의원직박탈을 당했다든가 하는 정치적 박해를 당했지만 DJ에게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DJ는 71년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한 뒤, 73년 일본에서
창간 9주년 특별기획 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 전문③입니다.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③ 동영상14. 97년의 역사적 선택 속에서 그렇게 나뉘어져 한나라당으로 가서 지도부를 지내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에 최일선에서 DJ와 싸우게 됐는데. 그때 여러 가지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을 거고...그렇죠. 97년에 내가 이제 맨 마지막에 그것도 뭐 선거 거의 임박해서 나하고 박계동, 김원웅 뭐 이렇게. 제정구 의원하고 이철 의원은 먼저 한나라당에 최병렬 통해서 입당을
ⓒ폴리뉴스다음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창간9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한국정당실록 60년] 관련해, 며칠에 걸쳐 손으로 직접 타이핑해 보내준 원고 전문이다. 이 원고는 지난 1월22일 와의 인터뷰 후 보강내용으로 보내온 것임을 밝힌다.이 전 의장의 열정과 성의에 취재진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1. 동아일보 기자시절 박정희-DJ-YS의 정치에 대한 인상61년 대학입학 두 달 만에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다. 두 달 남짓이었지만 4.19 민주혁명의 마지막 세례를 받았다. 6.3사태 이후 베트남 파병,